을 좋아했던 헤이리 아버지.
(014) 2023년 10월 6일 금요일
"아버지, 저 꽃 이름 궁금하세요? 제가 알아다 드릴게요."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마당에서 담배를 태우던 아빠 옆으로 가 물었다.
"아빠, 이 노란 꽃은 이름이 뭐고?"
"요거? 요거는 달맞이꽃이지. 와?"
"아니, 오늘 병원 차 타고 집 앞에서 내리는데 이 꽃 예쁘다 카면서 이름을 궁금해하시더라고. 헤이리 사시는 아버님이."
헤이리 아버지는 나와 병원 차를 함께 타고 다니는 투석 친구였다. 다리를 잃고 휠체어에 앉아 계셨던 헤이리 아버지와 나는 눈이 무척 많이 오던 계절에 처음 만났다. 고운 어머니가 휠체어를 밀어서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되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또 집으로 돌아가 출근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각자 투석이 끝나면 헤이리 아버지와 나는 또 병원차를 타고 함께 귀가했다. 병원에서 가장 멀리 사는 내가 아침에 차를 제일 먼저 타고, 그다음 헤이리 아버지 내외, 교하를 거쳐 신도시의 병원으로 가는 코스였다. 귀가할 때는 가까이 사는 분들을 모두 내려 드리고 내가 제일 마지막에 내리는 코스였는데 가끔 답답하다고 나를 먼저 내려주기를 원하실 때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드라이브를 즐기고 싶으셨던 거다.
아버지는 조금 늦게 결혼해서 낳은 아드님이 한분 있었는데, '이 눔 시끼'하면서도 아드님을 무척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모가 뒷받침을 해주지 못했는데도 외국어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명문대에 입학한 아들. 키가 크고 인물이 좋은 아들은, 군 제대 하자마자 4개월 동안 공부해서 서울청 소속 경찰공무원이 되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던 때 다리를 잃었다는 아버지는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해, 아들에게도 아내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일부러 그런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쓰시는 모습이 되려 마음 아팠다.
"나는 정연이처럼 귀여운 딸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아들놈 하나 낳고 더 못 낳았네."
어느 날 그런 말씀을 하시는 아버님에게 "그럼 제가 이제부터 아버지라 부를게요. 저를 딸처럼 생각하셔요."
그 후로 나는 아버지 휠체어를 밀어드리기도 하고, 가끔 아버지 대신 막걸리를 사다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늘 병원이 끝나면 1층 편의점에서 막걸리를 사셨다. 투석 외에는 외출할 일도, 할 일도 없는 아버지가 홀로 있는 집안에서 적적함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도 부르고, 혈당도 막 오르지 않는 것 같아서 좋아."
아버지는 변명하듯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싱긋 웃고 아버지의 작은 가방과 지폐를 받아다가 막걸리 두 병을 사서 가방에 넣어와 아버지 무릎에 얹어드리곤 했다.
노란 꽃을 보며 눈을 반짝였던 그날이 수요일 오후였던가. 금요일에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 노란 꽃이 '달맞이꽃'이라고 알려드렸다.
"달맞이꽃? 고 녀석 거 이름도 예쁘네. 달맞이꽃이라..."
연휴 마지막 날, 일산에 갔다 오는 길에 '청아공원'이라는 입간판을 봤다. 그걸 보는데 마음이 요상하다 싶더니, 헤이리 아버지가 계신 곳이라는 게 오늘 문득 떠오른다. 돌아가신 지 벌써 6-7년쯤 되었나 보다. 가을에 떠나신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 장례식에 갔었다. 고마워하며 어머니가 손을 잡아주시고, 등을 두드려 주셨었는데.
아직도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못했구나... 이제는 노란 달맞이꽃 다발을 하나 사고, 아버지 좋아하시던 막걸리를 사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 더는 미루면 안 될 것 같다. 달맞이꽃보다 환한 아버지의 미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