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버튼을 눌러야 길을 건널 수 있다.

by 이정연


오늘도 춥다, 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옷장 밖의 헹거에 걸어두었던 초봄용 긴 코트를 걸쳤다. 소화하기 힘든 색인데 어찌 된 일인지 내가 이 옷을 꼭꼭 씹어 소화시킨다. 신기한 일이다.

이 옷을 입으면 제법 멋스럽고, 봄답지 않은 날카로운 기온이나 바람을 이겨내기에도 제격이라 주윤발이라도 된 양 코트에 두 팔을 꿴다.

새벽 6시 45분 집을 나선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좋은 시간이다. 두 켤레에 만 구천구백 원 하는 단화 중 마음에 드는 한 켤레도 오늘 개시다. 병원에 출근하는 것치고는 아주 멋스러운 차림이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거울을 보니 머리가 아주 엉망이다. 간밤에 악몽을 꾼 듯, 일어나서부터 기분이 좋지 않고 몽롱했는데 빗는다고 빗고 묶은 머리가 아주 가관이다. 앞머리 개망. 기분이 망했다. 이 머리를 하고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7시 3분 전철을 탔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기분이 너무 엉망이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사실 마감을 지키지 못했음이 떠올라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전철 좌석이 뜨끈해서 세상 온갖 시름이 잊히고, 글을 쓰다 보니 '에잇, 이깟 머리쯤이야.'하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눈만 지그시 내리깔고 핸드폰 화면에 집중한다. 글 주제를 하나 가지고 주말 내에 글을 쓰려고 했는데 쓰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글 쓰는 일이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마감을 지키지 못했어도 괜찮다고 오늘의 못생긴 내 어깨를 마음으로 토닥해준다.


내릴 역에 도착해, 맞은편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와 둘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또 거울 속에 못생긴 내가 보인다. 손으로 앞머리를 아무리 쓸어도, 이 머리는 가망이 없다. 나는 못생겨서 슬퍼야 하나? 에잇,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아. 역의 구름다리 양 쪽으로 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다. 내가 탈 마을 버스가 사람을 마구 뱉어내고 있다. 그들은 오르고, 나는 내려간다. 그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버스는 무슨 일인지 다시 사람을 태우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나는 정류장의 길다란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그리고, 길다란 의자에 앉자마자 발을 밟혔다. 여름에 어울리는 뜨개 느낌의 단화. 그런데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아주 두툼한 운동화를 신고 아주 오래오래 내 발을 밟았다. 사실 한 5초 정도였으나 밟히는 동안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진심으로. 내가 '아아아악' 길게 음을 빼며 소리를 지르고서야 밟고 있던 발을 떼고는 웃으며 "미안합니다" 하시는데 나도 같이 웃어버렸다. 이 단화의 특성상 맨발을 밟힌 거나 마찬가지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어른이 되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할아버지는 젊고, 둔감했다. 어떻게 그렇게 지그시 밟고도 모를 수가 있지. 너무 오래 밟혀서 나도 저절로 길게 음을 뺀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되돌아 온 마을버스를 탔다. 아직까지도 발이 아프다.


어쨌든, 글을 쓰다 보니 내가 계속 쫓던 글이 보였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쓰는 글을 좋아했다. 한 시간 남짓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쓰는 걸 좋아하던 날들이 있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 썼던, 세상에 하등 도움될 것 없는 나의 아침 풍경 그리기를 좋아했다.


다시 처음 브런에 글을 쓰던 시절처럼, 오늘 오랜만에 버스 안에서 글을 마무리한다. 글을 쓰다보니, 기분이 꽤 좋아졌다. 아침 햇살처럼 밝은 기운이 마음을 스쳐간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아침 공기에서 마아가린에 지진 빵 냄새가 났다.

발행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이 길을 건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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