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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팔이를 가장한, 친구에게 전하는 오늘

by 이정연


요즘 사람이 많이 뾰족해졌습니다. 아파서 그래요.

이런 핑계를 대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마음이 아파서 정신을 부여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따스한 댓글들을 읽으면서도 차마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그 수많은 마음들에 이 글로 답을 드립니다.




유독 가혹한 5월이었습니다. 흔히, 5월 하면 장미도 피고 날씨도 산뜻한 계절인데 저는 내내 불행에 잠겨있었습니다.


몸에 이상을 느꼈던 올해 봄. 평소 투석하는 병원이 아닌 M 병원에서 호르몬 검사를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당연히 아무 이상도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상수치를 몇 배나 벗어난 호르몬 수치가 하나 있었습니다. 검사결과지를 먼저 확인하고 꽤나 놀랐지만 별 것 아니리라 생각했습니다. 모르면 용감한 법이니까요.


나와는 서로 낯선 얼굴인데도 M 병원의 선생님은 온화한 미소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 호르몬(P) 수치에 이상이 생기는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복용하는 약 중에 이 수치를 일시적으로 상승시키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뇌하수체 선종, 흔히 말하는 뇌종양이 그 원인일 수 있다.

"정연씨,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뇌종양이라고 보기에는 우리 정연씨 수치가 많이 높지 않거든요. 뇌종양이라고 판단하려면, 적어도 이 수치가 200은 넘어가야 하는데 정연씨는 93.1이니까요. 정연씨가 투석하는 병원에 가서 담당 선생님과 상의해서 약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있는지 보고, 약을 바꾸면 금방 수치가 떨어질 거라고 봐요. 약 바꾸고 우리 한 일 이 주쯤 있다가 다시 만납시다."


그 다정한 말투와 얼굴에, 안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뇌종양이라는 극적인 병명은 자꾸만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M 병원을 나서는 길로 즉시 투석하는 병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주치의는 회진 중이었습니다. 바쁜 시간에 되돌아온 내가 짜증스러웠던지, 뜬금없는 타 병원 검사결과지와 그 아래에 쓰인 설명에 당황한 것인지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본인은 P 수치를 올릴만한 약을 처방한 바가 없다. 그러므로 P 수치 상승의 원인은 뇌종양뿐이다. 대학병원 내분비 내과를 찾아가 보라. 대학병원에 갈 수 있게 의뢰서를 써 주겠다. 그 말이 나오기까지 그녀가 했던 행동이나 말투는 되새기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의 환자였던 젊은 나에게 뇌종양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태도는 딱 그러했습니다. 본인과는 무관한 일, 이 모든 것은 너의 일이고 너의 몫이다. 단 1g의 연민도 걱정도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서류를 꾸리는 데에도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고, 나는 병원 안에서 기다릴 수 있을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고역이 되어 밖에 나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서류를 받아 들고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평소에 다니는 대학병원 내분비 내과의 선생님들 면면을 살폈습니다. 뇌하수체를 전문으로 보시는 선생님들을 추려서, 내가 갈 수 있는 요일과 진료시간 등을 체크했습니다. 뇌하수체를 전문으로 하는 선생님은 딱 세 분이고 그중 한 분은 이미 환자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환자를 받을 수 없는 분, 나머지 한 분은 내가 투석하는 요일에만 진료를 보셔서 안됩니다. 젊고 인상이 순한 남자 선생님에게 가장 빠른 외래 진료를 잡았습니다.

이런 다급한 순간에는 아주 빠릿빠릿합니다.




뇌종양이라는, 너무도 극적인 병명 앞에 나는 계속 가라앉았습니다. 꼭 인생에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식사도 엉망으로 했고, 약을 하나도 먹지 않았습니다. 맞아요. 제 오랜 친구인 당신이라면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를 그 하루 24알의 약 말이에요. 그리고 주변 정리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는 이미 너무도 불행한데, 여기서 더 불행해질 자신이 없었습니다. 더 불행해진 나의 욕심으로 곁에 누군가를 잡아두는 일은 더더욱 자신이 없었습니다. 주변의 모두에게 못되게 굴었습니다. 특히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못된 말을 쏟아냈습니다. 나의 불행이 너무 깊어져 언젠가 그가 먼저 나에게 진절머리를 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서로에게 소중할 때, 소중한 모습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참 우습죠? 드라마 같은 곳에서는 여주인공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죽을병에 걸리고도 환하고 예쁘게 웃으면서 이별을 고합니다. 물론 그 냉정한 이별이 거짓임을 안 남자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죠. 그런 드라마를 한 번 찍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냥 비련의 여주인공이 한 번 되어보고 싶었습니다. 세상 모두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혼자 발버둥 치던 옛날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왜 나는 잠자코 있지 못할까. 어쩌다 연락이 닿은 사람, 정말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는 모두 뇌종양의 가능성에 대해 알렸습니다. 의외로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빛나는 마음을 더 깊게 느끼게 하였습니다. 들었던 중 가장 가슴에 깊이 남은 것은 계속 곁에 있겠다던, 사실은 너도 내가 너의 곁에서 잘 버텨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하던 소중한 사람의 말입니다.


브런치에는, 뇌종양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면 이야기하려고 입술을 꼭 깨물고 혈액검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겨우겨우 MRI 검사실 예약을 잡아 생애 처음으로 MRI 기계에 넣어져 보았습니다.


모든 검사 결과를 취합해, 어제 오후 '뇌하수체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 뇌종양이 아니다.'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습니다. 내분비 내과 전문의인 선생님이 판독할 수 없는 MRI상 소견을 영상의학과에서 받았으므로, 그 부분을 판독할 수 있는 신경과 선생님을 또 만나야 합니다. 외래 진료 전날, 뜬 눈으로 아침이 밝아오는 걸 보았습니다. 그 불안한 마음이 이런 식으로 적중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신경과 예약을 잡아준다고 하여, 내분비 검사 예약실에서 기다렸습니다. 진료실에서 심각한 이야기들을 이미 많이 들었던 나는, 최대한 빠른 예약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분비 검사예약 담당 간호사 선생님은 열흘 후를 얘기합니다.

5월부터 뇌하수체 선종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까지 우울감에 몸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또 아슬아슬한 마음을 안고 열흘을 지내라고 하는 그 말이 너무도 야속했습니다.


내 몸을 아래 위로 훑던 그녀가 말합니다. 대체 어디가 불편해서 신경과에 간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보행 장애가 있어요? 멀쩡해 보이는데? 아무 문제없는데 신경과로 보내면 우리가 곤란해요.

이 분은 어떤 검사예약을 하든 이런 식이었습니다. 투석하는 환자라고 말했음에도 사구체 여과율이 떨어지면 조영제 투여에 문제가 생기므로 MRI실에서 쫓겨날 거라고 겁을 줬고, 그 덕에 투석하는 병원과 대학병원을 오가며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의 MRI는 조영제를 한 방울도 투여하지 않는 검사였습니다.


나도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진료실에서 오고 간 말들을 하며, 위급한 상황인데 그렇게 기다리라는 것이 말이 되냐고. 당장 10일에 남는 자리가 없는지 알아봐 달라고 강하게 말했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예약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또, 잠들지 못한 밤이 지나고 투석을 받으러 갔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강한 어조로 뇌종양이라고 했던 주치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그 말을 했더니, 수 선생님이 말합니다. 네가 지금 상황이 이러니까 마음이 안 좋아서 원장님 말을 꼬아서 들은 거야. 원장님은 너에게 단정적으로 말하진 않았어. 내가 그 자리에 없었긴 하지만.

참 우습습니다. 옆에서 주치의의 단정적인 뇌종양 소리를 함께 듣던 간호사 선생님은, 병원을 나서던 나를 따라왔습니다. 등을 두드리며 괜찮다고 위로해주었습니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몇 번이고 눈 맞춤을 하고 웃어주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결국 수 선생님은 본인의 고용주인 주치의 편을 듭니다.


요즘의 나는 계속 잡니다. 우울하니까, 내 생이 끝나는 것만 같은 시간들이 자꾸만 나를 괴롭히니까 방법은 누워서 잠드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정작 자야 할 시간에는 또 밤을 새워 내 생이 어떻게 될지 방황하는 마음을 안고 고민합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은 밤이 이어집니다.


내가 아픈 순간, 치료받아야 하는 순간에 머무르는 모든 이들이 나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친구인 세라는 말씀하셨습니다. 병원을 옮기라고. 나 또한 병원을 옮겨야 한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고, 그래서 시내에 투석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병원들에 모두 연락을 넣었습니다. 환자가 많아서 자리가 없다고 거절을 당하기도 했고, 겨우겨우 대기명단에 올려두긴 했지만 누군가 죽거나 병원을 그만둬야만 자리가 난답니다. 투석은 원래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받는 것이 정석입니다.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병원을 옮기면, 이제는 시 경계를 넘어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만큼 우울한 날이 계속됩니다.

어느 날은 당신의 댓글에 너무도 기운이 나고 기분이 좋아, 밝은 마음이 되어 답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기운이 나지 않아 이렇게 나의 병팔이 근황으로 답을 대신합니다.

몇 주 째 두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배도 자주 아프고, 무엇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는 느낌입니다. 다만, 평소에 없던 통증들을 겪으며 앞으로 두통이나 복통에 시달리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마음의 토대를 쌓고 있는 것이라는 아주 우스운 위안을 삼아 봅니다.


대학병원이 아주 저의 참새 방앗간입니다. 열두 시간 후, 나는 또 그곳에 가 있을 텝니다.

부디 나에게도, 또 당신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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