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의 오전

by 이정연



병원을 옮기고 나서 좋았던 점 중의 하나는, 같은 건물에 원래 다니던 안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여기는 좋은 건물이 맞다.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있고, 버거왕씨네 가게도 있고. 뭔가 도시의 가장 중심부에만 있을 법한 장소들이 다 있어서 좋다. 2~3년 전 이 동네에 살 때는 영화관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때는 영화를 보는 것이 삶의 낙이어서, 거의 영화 평론가처럼 영화를 봤더랬지.(편수가 많은 면에서만.)

그러다 무기력이 나를 찾아오고, 영화관에 앉아 있는 일에 집중도 되지 않고 가슴이 갑갑할 즈음 영화 보기를 관두었다.


무기력하고, 좋아하는 일도 모두 사라진 그런 날들.

사실 요즘 다시 그런 시기가 찾아왔다. 아픈 것이 나의 직업 같기도 하고, 운명 같기도 한 그런 나날들.

병원도 늘 시간 맞춰서 잘 가고, 출근도 잘한다. 출근해서 업무도 열심히 한다. 늘 내가 해야 하는 일 그 이상을 해내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들에 나는 늘 부정적인 망상에 빠진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앓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면 쉬어야 하는 날들도, 부록처럼 따라온 병과 관련된 과나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보는 일로 꽉 차 있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관성처럼 움직인다.




일찍 잠들지 못했지만, 일찍 깨어났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동생 소리가 밖에서 나지 않기에 몸을 일으켜 동생 방문을 열고 소리쳐 아이를 깨웠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10분이 지나도록 조용하다. 그래서 다시 소리쳐 이름을 불렀더니 이번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척이 주방으로 이동한다. 아침부터 쓸모 있는 일을 하나는 했다. 그러나 무기력해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약을 먹어야 한다. 아침에는 중요한 약이 들어가 있다. 꼭 먹어야 한다. 철분제라던가 비타민 같은 것. 웃자고 한 소리다. 물론 철분제나 비타민도 무척 중요한 약이긴 하겠지만.

약을 먹기 위해 간단하게 아침을 데웠다. 멍하니 저작 활동을 한다. 정확하게 식사의 반절을 먹은 후, 하얗고 커다란 둥근 알약 두 개를 삼킨다. 그리고 남은 식사의 반절을 먹어 해치운다. 기존에 다섯 알이던 식간 약을, 새로운 약 두 알로 대체해 준 새 주치의에게는 고마운 마음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식후 약 다섯 알을 삼킨다. 새로 병원을 옮기고 나서는 약봉지를 철저히 관리한다. 봉지마다 날짜를 모두 써 두었다. 약 먹는 일을 절대로 잊지 않도록. 그런데 오늘의 아침 약은 22였다. 약상자를 살펴보니, 22 다음에 24가 있다. 아마 어제 23을 잘못 빼먹었나 보다. 내용물은 매한가지니 상관은 없다.


멍하니 티브이 아침 정보 프로그램들을 돌려보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가 벌렁 들어 누웠다. 안개가 부옇게 낀 듯 기분이 좋지 않다. 또다시 멍하니 부정적인 망상에 빠지려 할 때쯤, 벌떡 일어난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한다. '모든 일은 나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났다. 세수한 얼굴을 토너 패드로 닦아내고, 에센스를 듬뿍 발라 두드려 준 후 선로션을 발랐다. 늘 이 정도의 기본만 내 얼굴에 신경을 써주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또 스친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내일부터는 선로션을 꼬옥 발라야지.


검은 슬랙스에 서랍에서 티셔츠를 잡히는 대로 꺼내어 입었다. 영하 4도니까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패딩을 입는다. 그리고 까만 가방을 사선으로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팔목이 부러졌던 이후, 소중한 사람은 늘 내게 조심히 다닐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나도 늘 걸음마다 긴장하고 제대로 걸으려 노력한다.

머릿속은 텅텅 비어버렸지만, 몸만은 성실히 병원을 향해서 간다. 어제 투석이 끝난 후, 3개 층 아래의 안과에 왔지만 휴진 중이었다. 그래서 오늘 다시 들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었다면 오늘도 무기력하게 누워있었겠지.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인기가 많은 안과의원이다. 역시나 오늘도 환자가 많다. 무기력한 가운데 요즘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독서를 이곳에서 한다. 문고판이라 가지고 다니기가 좋다.

한 시간쯤 기다리니까 내 차례가 되었다. 결과도 언제나처럼 좋고, 궁금했던 것도 명료하게 해결되었다. 만날 때마다 기분 좋은 나의 선생님.

처방받은 안약을 사 가지고 힘차게 전철역으로 들어서니 딱 맞춰 전철이 도착한다. 이제 우리 동네 역에 내리면 시원한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한 잔 살 테다.


쭈욱 무기력했고, 나 자신이 싫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소중한 사람에게 들켜서, 깨어난 아침의 기분은 또 끔찍했다. 병원을 가는 길에 걸으면서도 의문이었다. 나는 왜 이토록 나를 견디지 못할까. 나 자신이 왜 이리 싫은 걸까.

생각이 많은 게 문제인 나는, 또 나 자신의 싫은 점이나 견딜 수 없는 점을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 더 깊게 땅굴을 파고 들어갈 것이 뻔하다. 그래서 오늘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한 장한 정연에게 좋아하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사줄 것이다. 이 달콤한 것 마시고, 해야 하는 일들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손을 꼭 잡아주고 어깨를 두드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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