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출연 제안이 왔었습니다.

by 이정연



제안 메일이 자주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에게 전달되는 제안 메일의 대부분은 '기타' 목적으로 옵니다.


10월의 그날, 어쩌다 제안 메일 알람을 실시간으로 보았고 바로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처음으로 받은 '강연, 섭외' 목적의 메일이었는데, 읽자마자 무척 놀랐습니다. 무려 유력 종편 방송사 작가님의 출연 요청이었거든요. 창사 10주년 기념으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할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가족들, 소중한 사람과 상의하고 대략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하지 않는 것으로요. 그러고 나서 친한 친구 몇 사람에게 방송 출연 제안을 받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동갑이지만 저보다 사회경험이 훨씬 풍부한 친구는 나의 생각이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방송에 비춰져서 피해를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걱정을 했습니다. 그 생각에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 아직은 브런치 내에서 악플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사진을 올리는 채널에서 제 의도를 해하고 공격하는 분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생생하고도 따스한 삶의 순간을 담고 싶었던 나의 의도가, 나이 든 분을 향해 렌즈를 들이댔다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를 도촬 했느니 하며 공격당했습니다.


방송 이후에는 그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두려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와 소중한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결코 되돌릴 수 없을 일이어서 아무런 답변을 드리지 않는 것으로 답을 드렸습니다.


***의 작가님이 주셨던 메일입니다.


방송의 취지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방송을 통해 제가 어떤 사람으로 비칠지 두려웠습니다. 제안을 받던 즈음은 팔목이 골절되어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아프지만 씩씩하게 이식을 기다리는 투석환자'? 아니면 '젊은데 이식을 받지 못해 애처롭게 살아가고 있는 투석환자'? 그 어떤 역할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식을 기다리는 투석환자의 대표 격이 되어 인터뷰와 촬영을 해서 투석환자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투석환자를 몇 가지의 원인 질환으로 나눌 수는 있겠지만, 발병 이후 살아가는 개개인의 모습은 모두 다를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저 일 뿐이니까요. 무엇보다도 슬픈 환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습게도 저는 ESRD의 원인도 불분명합니다. 제 진단서에는 원인불명이라고 쓰여있거든요. 투석환자의 분류에서도 저는 몇 걸음 떨어져 있습니다.




아픈 일은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매 순간이 불행이고 불안입니다. 아픈 일에 취해서 스스로를 동정하던 길고 긴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스스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끔씩 힘들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솔직함은 괜찮지만 매 순간 나의 병을 내 삶의 중심에 놓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일을 '나의 목숨을 구하러 가는 숭고한' 출근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가는 일은 소풍이나 출장으로 생각했습니다.


ESRD라는 병에 이것저것 부록들이 덕지덕지 따라붙었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고, 한없이 주저앉아 울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 대신 아파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이 생을 살아줄 수도 없었고, 나는 용기가 없어서 이 생을 완전하게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속 편하게 이 생을 영위하는 방법들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용기라기 보다도, 어쩌면 회피일지도 모릅니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치료를 중단하는 것으로도 쉽게 삶을 끝낼 수 있는 이 삶의 적나라한 사실을 덮어두고 좋은 면만 의식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계속 이렇게 회피하면서 살아갈 겁니다.


나는 또 많은 순간, 나를 위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니까. 그런 순간의 단단함과 당당함을 위해 나 자신 앞에 '아프다'는 수식어를 붙이고 살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아픈 일은 절대로 불행이 될 수 없습니다. 아파도 인생은 계속됩니다. 살고자 하면, 또 다 살아지는 게 인생입니다. 우리, 불행에 지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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