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가치는 타인을 통해서

나는 아직 부족하니까.

by 이정연


투석 혈관 시술을 나는 참 자주도 받는다. 3월 초에 받았는데, 어제 또 시술을 받고 왔다. 투석혈관에 문제가 자주 생기는 경우, 3-4개월에 한 번씩 시술대에 눕게 된다. 투석혈관에 문제가 자주 생길 때, 교수님이 걱정하신 것은 이러다가 주기가 더 짧아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걱정은 어제로 현실이 되었다.


그동안은 시술이 그렇게 부담되지 않았다. 아주 오랜 투병기간 동안 보호자가 꼭 동행해야 했던 이 시술은 늘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사고처럼 갑자기 혈관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출근해야 하는 가족들에게 폐를 끼쳐가면서 시술에 동행해달라고 말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래서 그 언젠가의 시술 때, 도저히 그 누구도 나와 동행해줄 수 없었던 때 중재실 선생님께 졸랐다. 혼자서 가면 안 되냐고. 모두 출근해서 나는 보호자가 없다고 살짝 징징 거렸다. 나는 비교적 마취 상태에서 잘 깨어나며, 깨어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매우 강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은 "정연씨라면 괜찮죠."하고 환자-보호자 일체 시스템을 허락 해주셨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환자들의 낙상 사고에 민감해진 병원이, 더는 나와 같은 환자를 눈감아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보호자 동행을 강조하셨고, 시술 후에라도 반드시 보호자가 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보호자가 없이는, 내 혈관이 어떤 상태이든 절대 시술 불가라고 말이다. 꼭 가족이 아니어도 된다, 누구든 보호자로서 와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는데 나는 친구가 없다. 서울 출신이 아닌 나는, 친구들이 모두 멀리에 있다. 그마저도 친구의 수가 엄청 적다. 게다가 당장 내일 시술을 받아야 하는데, 모든 걸 뒤로 하고 달려와 줄 사람은 더더욱 없다.


2월의 그때, 투석 중에 신장중재실 예약을 잡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가족들에게도 모두 연락을 해 보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엄마는 월 단위로 근무표가 짜이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동생은 팀장 신분으로 무척 바쁜 회사에 다니는 터라 연차든 월차든 2주 전에는 팀원들과 상의를 해야 한다. 가족들과 연락을 해 보아도, 보호자로 나서 줄 사람이 없으니 일단은 시술을 포기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극적으로 엄마가 시간을 낼 수 있는 하루가 있어서, 엄마가 보호자가 되어 주는 날로 시술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될 수 있었던 멋진 시간은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멋없이 보호자가 필요한 환자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조금은 의기소침해진 채로 3월 2일, 시술을 받았다.


스물다섯 살의 그녀가 나를 찾아온 것은, 그 시술이 있은 지 며칠 후였다.


"정연님, 시술받고 오셨어요?"

"네. 시술 잘 받고 왔어요~"

"아 그러셨구나... 시술 예약 잡으시던 날, 제가 끝나고 정연님을 찾으니까 정연님이 이미 가고 안 계시더라고요. 보호자가 없으시면 제가 같이 가드리려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다른 선생님들 계신 곳에서는 좀 곤란해서 정연님 투석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제가 다른 일 보는 사이에 가셨더라고요."

"와, 선생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저 다행히 엄마가 시간 내셔서 같이 다녀왔어요."

"앞으로도 혹시 그런 일 생기시면 언제든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제가 같이 가드리고 싶어요."


지난가을, 이 병원에서 박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챘다. 얼굴이 하얗고 홑꺼풀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아주 예쁘장한 얼굴의 그녀가, 나만 보면 생글생글 웃더라. 간호사 명찰이 없어서 직접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봤던 날, '정연님이 제 또래인 줄 알았어요.'라고 기분 좋은 칭찬을 수줍게 하던 그녀. 겨울에는 병원 밖의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녀가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녀는 자꾸 지근거리에서 날 흘끔거리더니 다가와서 "정연님, 맞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더랬다. 내가 서울 강남에 있는 병원에 다니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보호자가 되어주려 했던 그녀의 그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더불어, 나와 알게 된 지 몇 달 되지 않았음에도 그런 수고를 할 만큼 내가 누군가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를 소름 끼칠 만큼 기쁘게 만들었다.


나는 내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내가 잘못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스스로는 스스로의 가치를 절대 인정하지 않으니까.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머무르며, "너는 좋은 사람이야. 기꺼이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직 한 없이 부족하니까. 나의 가치는 타인을 통해서 확인받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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