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석은 항상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꾸준하게 받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투석환자에게 스케줄 변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월, 수, 금 오전반으로 10년 7개월째 투석을 받아오고 있다. 그리고 화, 목, 토에 투석을 받는 분들도 계시기에 병원은 일요일을 제외한 1년 313일 쉬는 법이 없다.(일요일을 제외하면 313일쯤 되는 것 같다.) 공휴일도, 명절 당일에도 우리는 병원에 간다. 그리고 생일이 월, 수, 금 중에 있으면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병원에 누워 있기도 한다.10년을 넘게 투석을 하다 보면, 우울한 생일도 꽤 여러 번을 맞이하게 된다.
제일 처음 투석을 하게 된 이후 맞이했던 명절에는, 명절에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병원 시스템이 무척 신기했고, 그에 따라 명절 연휴에도 쉬지 못하고 출근하는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희생이, ESRD라는 희귀 난치질환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는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공휴일은 나에게 가장 좋은 날이 되었다. 병원을 오갈 때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는데 공휴일에는 대중교통이 한산하기 때문에다른 평일들보다 훨씬 좋다!
이 무거운 병 때문에, 때로는 아주 작은 일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역설은 나를 꽤 자주 웃게 한다.
어쨌든 오늘은 공휴일. 나는 기분 좋게 병원으로 출근해서, 몰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요즘 잠이 쉬이 오지 않아 고생하는 중이라, 가장 깊게 잠드는 곳이 바로 병원의 내 침대다.
그렇게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잠들어 있는 사이에 혈압이 많이 떨어지면, 자연스레 잠에서 깨어난다. 잠에서 깨어나서 하품을 엄청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 침대의 발치를 높여서 조금이라도 저혈압 증상을 막아보려고 노력한다.
오늘도 나는 갑작스레 잠에서 깨어나 침대 발치를 높이기 위해 침대 리모컨을 잡는다. 그 순간 내 몸통에 가지런히 붙어 있던 핸드폰이 웅웅 소리를 내며 울린다.
이상하다. 병원에 누워있는 시간에는 연락이 거의 잘 오지 않는데, 이 진동소리는 뭔가 불길하다.
동생은 지난 주말부터 감기 기운이 아주 심했다. 코로나라고는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고, 일단 주말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 토요일 저녁에는 얼굴을 보았다. 퇴근하는 나를 태워준다고 하여,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금요일 밤부터 앓았으니, 주말 동안 쉬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아이가 자꾸만 더 감기 증상이 심해지기에 일요일에는 내 신경은 쓰지 말고 무조건 쉬라고 해두었다.
그런 주말을 지난 월요일, 동생이 "미안하다..."라고 카톡을 보내온 것이다!
동생은 감기가 아닌 코로나였고, 주말 동안에 동생 방을 드나들며 식사를 챙겨주고 약을 먹이고 체온을 측정해주고 했던 엄마까지 함께 코로나에 감염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나는 늘 병원에 드나들기에, 코로나 시대에는 감기에도 걸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동생과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다.)
일요일 밤, 회사에서 야근 중이었던 엄마는 목이 따끔함을 느꼈단다. 그 길로 바로 진단 키트를 해 보았고(의료기관이라 키트가 많이 구비되어 있다.) 연하게 두 줄이 떠서, 집에 오자마자 둘이 함께 휴일에도 신속항원검사를 할 수 있는 동네 소아과에 가서 나란히 코로나 양성 진단을 받았단다.
엄마는 직업상 환자들을 많이 대하고, 집에도 환자인 내가 있기 때문에 늘 동선에 신경을 쓰며 지내왔다. 집과 회사만 오갔고, 회식이라 해봤자 아주 가끔씩 팀원들과 식사만 하고 바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전부였다. 동생은 코로나 백신 2차까지는 아주 조신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러나 3차를 맞은 이후부터는 방역정책이 느슨해지기도 했고, 팀장이라는 직책상 꽤 많은 회식자리에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런 동생에게, 엄마는 늘 조심하라고 잔소리에 잔소리를 거듭했다. 효과는 없었던 것 같지만.
나는 뭐, 달리 말할 것이 없다. 평일에는 늘 병원과 집만 오갈 뿐이고, 주말에는 출근을 해서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손 소독제, 손 소독 티슈는 물론이고 아주 사정없이 손을 씻어댄 통에 손이 거칠어졌다.
병원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마스크는 벗어본 적이 없다.
물론 위기도 많이 있었다. 2020년 8월에는 다니던 병원에서 코로나 환자가 나왔고, 밀접 접촉자로 분류된 것까지는 아니지만 보건소에서 따로 연락을 받았다.
그때는 정말 엄청난 두려움에 떨었었다. 2주간 병원외에는 밖에 다니지 말고, 증상이 나타나는지 지켜보라는 말을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마스크를 쓰고 엄마를 내 방에서 내쫓았다. 내가 코로나에 걸려서 가족들에게 옮기게 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상상했고, 코로나에 걸려서 당장 투석을 하러 가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한참이나 고민했다.
당시의 우리 병원은 초토화가 되었다. 역학 조사를 한다고 보건소 등에서 나와서 뒤집어 놓았고, 그래서 병원 스케줄이 꼬이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병원은 시간별로 조를 편성해서 환자를 받기 시작했다. 환자들끼리 부딪히고, 붐비는 상황도 없애겠다는 계산이었다. 어쨌든 그 난리통에도 나는 2주간 아무 증상 없이 멀쩡했다.
그 두려움을 벗어난 이후의 가을부터는 아주 철저하게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KTX를 타고 다녔다. 막 연애를 시작한 때였으므로,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나의 인생에 첫 연애는 중요했으니까. 엄청 자주는 아니었지만, 기차를 타고 꽤 자주 서울과 대전을 오가곤 했다.
코로나 시대에 장거리 이동을 한다는 것이, 때로는 모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늘 신경 썼던 점은, 사람들이 가장 예매하지 않는 한산한 칸을 찾아내는 것.
코로나 초기에는, 국가에서도 방역에 엄청 신경을 써서인지 아예 통로 쪽 좌석은 예매가 되지 않도록 쭉 막아두어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었다. 나는 늘 가장 먼저 4인석을 예매해서 혼자 4인석을 차지하고 다니는 안전여행을 하곤 했었다.
그러는 중에도 우리 병원에서는 종종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곤 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와 다른 라인의 환자였기에 나의 병원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첫 코로나 소동 이후, 2년이 지났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2022년 8월에 이르기까지 나는 무사했다. 온 가족이 모두 3차까지 백신 접종을 끝냈다. 나는 투석환자이며 기저질환자이고, 엄마 또한 기저질환이 있으셔서 늘 조심했고,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었으니 이대로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를 제외한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려버리다니. 이제 나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무엇보다 이미 코로나에 걸려있던 동생과는 주말 밤에 함께 차를 타고 귀가하였으니, 아직 증상이 없는 것 같은 나도 사실은 잠복기인 것이 아닐까. 두려움이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다.
동생에게 온 가족 확진 소식을 듣자마자, 치프 간호사님에게 알렸다. 말씀드릴 때 마스크 위에다 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입을 가렸더니, 오늘 아침 니들링할 때 우리가 얼마나 대화를 많이 했는지 아냐며, 이제 와 내외하지 말라고 담백하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길쭉한 검사용 면봉을 가지고 와서 내 코를 깊게 쑤셔주셨다.
나는 순식간에 겁쟁이가 되었다. 나를 걱정해서 얼굴을 만져주려는 김 선생님의 손길도 마다했더니, 선생님이 그대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볼에 따스한 손길이 닿았다. 가족들이 걸린 거고, 정연씨는 괜찮을 거라는 말씀에 아주 조금 안심이 되었다.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나는 아주아주 쪼그라든 상태로, 전철역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