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소동 下

by 이정연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직 잠복기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일단은 가족들과 분리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동생도 내가 집에 머무르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을 떠안는 일이라며, 집을 나가서 지낼 것을 권했다. 가족들은 확진된 시점부터 이미 자가격리가 시작된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온 가족 확진이라는 상황에 놓이고 보니, 머리 회전이 전혀 되질 않았다. 일단은 나도 확진일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병원에 알아보았다. 코로나에 걸린 투석환자들만 모여서 치료받을 수 있는 투석 지정병원이 일산에 있다고 했다. 혹시라도 내가 확진인 상황이 오면, 그쪽 병원으로 가면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웬만하면 집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권유받았지만, 핸드폰과 지갑밖에 가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바깥 생활을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 짐을 챙기러 집에 가야한다고 했더니, 치프 선생님은 마스크 두 장과 장갑을 끼고 집 안에 들어가서 빠르게 짐만 챙겨서 나오라며, 장갑을 두 켤레 챙겨주었다.


나도 확진 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집 근처의 전철역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플랫폼에서 서성이며 고민했다. 이대로 무작정 집으로 가서 짐을 챙길 것이 아니라, 일단 신속항원검사를 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아서 검사부터 받아보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오늘은 공휴일. 휴일에도 검사가 가능한 병원 목록을 찾아서 전화를 해 보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응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철역에서 여분의 마스크를 사서, 집으로 갔다.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하나 더 덧쓴 다음에 벨을 눌렀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으니,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엄마는 신호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문을 열어 나를 반기려 하였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라고 소리를 꽥 질렀다. 동생에게 엄마 단속을 해달라고 전화를 하고서야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 내 방으로 쏙 들어갔다. 막막했다. 살면서 가출도, 자취도 해보지 않은 내가 바깥 생활을 위해 짐을 챙겨야 하다니. 일단 캐리어를 펼치고, 앞으로 밖에서 일주일 동안 지낼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사실 계산 같은 건 되지 않아서, 닥치는 대로 필요한 것들을 캐리어에 쓸어 담았다. 지금까지의 인생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번처럼 사고가 정지되는 일은 처음이었다. 꽤나 무거워진 캐리어를 끌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아까 전철역에서 호텔 예약을 해두었다. 수요일 아침 병원에 투석하러 가기 전까지 지내야 했기에, 병원에서 가까운 곳으로. 소중한 사람은 수시로 나와 통화를 하며, 나를 챙겨주었다. 오롯이 혼자인 고독한 시간에 유일하게 함께 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필요한 일이 아니면 메시지나 통화를 하지 않았던 동생과도 엄청 많은 연락을 주고받았다. 나는 15일 밤,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코로나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은 상처를 덮은 피딱지처럼 단단하게 내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과 통화를 하면서도, "혹시 나 코로나 아닐까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딱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뭔가 목이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코가 막힌 것처럼도 느껴졌다. 객실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서, 에어컨을 꺼놓고는 열이 나는 것 같다고도 웅얼거렸다.(더워서 그런거였다...) 냄새도 맡을수가 있고, 대체적으로 모든 감각은 이상이 없는데도 그렇게 무서웠다. 소중한 사람은 아주아주 깊은 새벽까지 나를 안심시키고는, 조금 쉬라고 토닥여주고는 자러 갔다.

나는 작은 객실의 커다란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보지도 않는 티브이를 켜 두고 눈을 멀뚱하게 뜨고 있었다. 신속항원검사든 PCR이든, 음성이라는 것을 확인하기까지는 잠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코를 킁킁거리며, 내 코가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했다. 냄새는 끊임없이 확인되었고, 그렇게 긴장이 조금 풀어진 나는 티브이에서 아주 오래된 드라마를 보았다. 2002년에 방송했던 '인어아가씨'가 흘러나오기에 홀린 듯이 드라마로 빠져들었다. 드라마를 길게 보고 나니, 아침해가 불쑥 떠올랐고 나는 샤워를 했다.


오전 9시를 한참 지난 때, 나는 비로소 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좋은 호텔은 아니지만, 시내 중심가에 있는 곳이어서 우리 병원도 가깝고 검사를 할 만한 병원들도 모두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2011년에 처음으로 내 신장이 이상하다는 것을 밝혀내 주신 윤 선생님네 내과에 갈 것이다.

호텔을 나와서 길을 건넜다. 8월의 한여름인 것을 잠깐이라도 잊게 할 만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어쩌면 내가 바라던 결과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서 마스크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10여분을 걸어서 도착한 윤 선생님네 내과는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방금 나를 스쳐지난 사람들이 연이어 '양성 확인서'를 발급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검사를 받았음직한 사람 모두가 양성이었다. 곳곳에 기침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일반 환자들과 검사하는 사람 간에 구별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혼자 서 있었다.


그러다 병원측에서 코로나 검사를 하러 온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나는 졸지에 마스크를 내리고 기침을 해대는 할머니와 마른기침을 하는 청년 사이에 끼어버렸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오늘 이 시간, 이곳에서 걸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다들 너무 하는구먼.


꽤나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문진을 하러 윤 선생님이 오셨다. 차례로 본인의 증상을 이야기했다. 나는 아무런 증상이 없다고, 가족들이 모두 걸려서 검사를 받으러 왔다고 하니까 어차피 음성일 텐데 왜 왔냐고 하신다. 투석환자라는 정보를 덧붙였더니, 그럼 검사 꼭 해야지. 태세 전환이 아주 빠르시다. 문진 이후, 임상병리사님이 차례로 코를 깊게 쑤셔주셨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나만 코로나 검사 대열에서 나오라고 하셨다. '음성일 것 같다'는 이유로. 그리고 10분이 지났을까. 나와 함께 대열을 이루었던 모두가 양성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진료실로 불려 들어갔다. 음성이란다. 나만 음성이어서, 특별히 나만 진료실로 불려 들어갔던 것이었다. 휘유.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윤 선생님을 만난 김에 말씀을 드렸다.

"10년 전에 선생님께서 초음파로 제 신장에 이상이 있는 걸 발견해주셨어요. 덕분에 지금까지 투석 치료 잘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10년 전이랑 지금이랑 변함이 없이 그대로셔요."

"아, 그렇습니까. 하하하하.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초음파는 안 해요."

서울대병원 근처의 수없이 많은 내과들을 돌아다녀도(당시 근무지가 근처였다), 의사 중 그 누구도 몰랐던 나의 신장 이상을 유일하게 알아채신 늙고 자그마한 이 의사 선생님을 11년 동안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가 어린애 대하듯 했던 그때의 나는 이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려서, 그는 내게 낯선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가깝게 느끼며 감사하고 있다.


밤을 새워가며 떨었는데, 결국 음성이구나. 코로나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병원(투석을 받는 곳)에서 연락이 왔었다. 나를 걱정하는 치프 선생님은 결과가 나오면 알려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병원에 제대로 서류를 제출해야 할 것 같아서 접수처에 '음성 확인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가슴에 음성 확인서를 안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근처에 있는 이 동네에서 가장 역사가 긴 파스타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를 포장해가지고 왔다. 혼자서 코로나 음성 기념으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 시간은 3시간 정도가 지나서 밤이 되어있었다. 음성인 것을 확인하기까지 잠 한 숨 자지 못했는데도, 그 이후 나는 또 잠들지 못했다. 혼자서 밖에 나와서 자는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인지 낯설고 무섭다는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다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었는데, 헛것을 보았다. 숙박비도 저렴하고, 병원과도 가까워서 대충 금요일 아침 체크아웃까지는 버티려 했건만 도저히 이곳은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에어비앤비에서 신도시 쪽의 오피스텔을 찾아냈고 예약을 마쳤다. 해가 뜨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호텔을 나왔다.


월요일부터 수요일 아침까지의 수면시간을 다 합쳐서 세 시간을 조금 넘는다니... 나는 병원에 당당하게 음성 확인서를 제출하고, 내 자리로 가서 투석 준비를 시작했다. 치료를 위해 이제 막 누우려던 찰나, 내 옆 침대로 누군가 기침을 하며 걸어온다. 그리고 집에서 자가진단키트를 해 봤는데, 양성이 나왔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간호사 선생님들은 그분을 유리로 된 격리실로 모셨다. 그리고 또 다른 선생님이 자리 소독을 하셨다. 세상에. 음성 확인서를 내자마자, 또 바로 옆 자리 환자분이 양성이라니. 내 인생도 참 순탄하다고는 볼 수가 없군.


지금 당장 괜찮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겸허한 마음으로, 늘 조심해야겠다 다짐하며 수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는 아주 편안하고 좋은 숙소에서 지냈다. 꽤 널찍한 오피스텔에서, 빨래도 하고 설거지와 청소도 하며 나는 코로나 격리가 아닌 독립생활을 하는 기분으로 지내며 조금씩 피로와 힘겨웠던 마음을 덜어내고 있었다.

주말에는 출근을 해서 열심히 일을 했고,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집에 도착한 지 2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가족들의 자가격리는 끝이 났다.




밖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내게 참으로 힘든 일이고, 또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 되기도 했다. 혼자서는 절대 살 수 없다고 말하던 내가, 그래도 철저히 혼자 지내는 시간들을 꽤 부지런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에어비앤비로 구했던 오피스텔에서 나오면서는, 처음 내가 들어가던 때와 똑같은 상태로 되돌려 놓고 나와서 호스트님에게 길고 긴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혼자서 힘겨웠지만, 혼자서 해낸 그 모든 일들은 스스로를 칭찬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족들이 참 많이 그리웠고, 크지 않은 나의 문간방에 너무나도 돌아가고 싶었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 할 일을 하더라도, 한 현관문 안에 있는 타인의 존재가 얼마나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가족 모두에게 친절해져야지, 그리고 바깥 생활을 하는 내내 유선상으로 함께 해주고 늘 걱정해주었던 소중한 사람에게도 잘해주어야지. 혼자만의 시간은 너무나도 힘들었고, 너무나도 뜻깊었다. 우리는 결국 또 이렇게, 모두 무사하다. 감사할 일이다.




일주일 간의 바깥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지도 얼추 열흘이 됐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옆 침대에 계시던 환자분은 어떻게 되셨을까. 그분도 확진된 후 일주일쯤 지났으니 언제쯤 병원으로 돌아오실지가 궁금해서, 니들링을 해주시던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그분은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하셨단다.

그리고 뒤이어하시는 말씀. 정연씨 숙이 알지?

나는 숙이 씨를 안다. 병원을 옮긴 지 1년이 다 되도록 아는 환자 한 명 없었던 내게 아기 같고 덩치가 큰 숙이 씨는 참으로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얼굴의 숙이 씨는 수더분한 차림새에 키도 덩치도 크고 행동이 아기 같은,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엑스레이 검사를 자꾸 안 하고 가버려서, 선생님에게 손이 이끌려 외래로 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그랬던 숙이 씨는 코로나에 걸리자마자, 죽었단다. 원래 심장도 좋지 않았던 탓에 코로나를 이겨내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생각했다. 나는 또 살아남았구나. 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치료를 받던 환자들이 죽는 일은 늘 내게 충격적이다.


그리고, 가족들의 감염 이전에도 나는 늘 위험한 상태였다. 사실 어디에서 감염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희귀 난치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위험한 곳이었다. 다니는 병원들에서도 코로나 확진자는 간헐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발생했다. 다만 그 중에 코로나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8월의 마지막 날 숙이 씨의 죽음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생각한다. 살아간다는 일은 참으로 덧없는 것이구나. 오늘 죽을 수도, 내일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로구나.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또 살아남았으므로, 내게 주어진 삶에 조금 더 감사하고 행복해 할 필요가 있겠구나. 또 위험에서 나를 살려낸 이 우주는, 대체 어떤 계획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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