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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을 먹고 다시 살고 싶어졌다.

by 이정연


어제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인간관계도 모두 짜증스럽고, 풀리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느낌. 오늘도 투석을 하고 지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새해의 첫 독서로 아껴두었던 이연님의 책을 택했다. 11년 전의 날들이 소름 끼치게 떠올랐다. 우리는 다른 병을 지녔는데, 소름 끼치리만큼 똑같은 생각을 거쳤음에 놀라며 버스에서도, 전철에서도 그녀의 문장마다 인덱스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였다. 그리고 늘 덮어두었던 투병 처음의 기억들을 마구마구 쓰고 싶어졌다.

그 마음을 안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단지 입구까지 걷는 동안 몇 번이고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별 것 아닌데도 온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오로지 약을 먹기 위해 점심을 차려 먹었다. 밥알이 모래알 같았다. 내 인생을 씹고 있는 것 같았다.




힘들면 털어놓으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에게 이야기해서는 달라지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너무너무 힘들었던 날, 얘기를 건넸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허공에 흩어졌다. 우리 각자 이고 있는 인생의 무게를 생각하며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그이가 다시 연락이 왔다. 뜬금없이 무슨 일 없냐고, 힘들면 얘기하라는 그 말에 아무 말 않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배님이 있다. 엄마의 건강 때문에 그분과의 약속을 취소하던 그날, 그분은 투정 부리고픈데 투정 부릴 사람이 없을 때 꼭 연락하라고 말씀하셨다. 따뜻한 진심. 그러나 좋은 사람에게 괜한 감정을 쏟아내고 싶지 않아서,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또 지쳐서 잠이 들었다. 기분 나쁜 찌뿌둥함으로 잠에서 깨었다. 딱 죽고 싶었다. 아픈 것도 지긋지긋하고, 그냥 살아가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도, 나를 상처 입히는 사람들도 다 지긋지긋해서 그냥 딱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참에 전화가 울렸다. 동생이다.


"누나, 짬뽕 먹으러 갈래? 사람들이 ##반점 짬뽕이 그렇게 맛있다 하네~"

요즘 너무 바빠서 늘 야근인 동생이 오늘따라 제 때 퇴근을 하나보다. 사실 짬뽕이 먹고 싶지도, 그 짬뽕을 먹으러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 죽고 싶거든. 그래도 나를 생각해주는 그 말에, 집에서 먹자고 했다. "그 집, 배민에 있다. 배달주문하면 된다."

아무런 기대 없이 침대에 누워, 동생 카드로 간짬뽕과 국물짬뽕을 한 그릇씩 주문했다.


동생이 퇴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딱 맞춘 듯이 짬뽕이 도착했다. 둘이 마주 앉아 짬뽕그릇 뚜껑을 열었다. 일부러 매운맛 2단계로 주문했더니 꽤 매웠다. 그리고 엄청 맛있었다. 후루루루룩. 육척장신과 나란히 면치기를 했다. 육척장신께서는 국물에 밥까지 한 대접 말아 드셨다. 배가 부른 우리는 하나는 소파에 또 다른 하나는 바닥에 누워 티브이에 유튜브를 연결해놓고 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귀에 에어팟을 꽂고 '김장장 TV'를 켜놓고 종일 쌓인 설거지를 하고, 주방을 정돈한다. 엄마가 요리하며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양념통들도 제자리에 가지런히 세우고, 바닥도 깨끗하게 닦는다. 음식물 쓰레기 통도 깨끗하게 씻어내고, 뜨거운 물에 그릇을 뽀독하게 닦으며 우울함을 씻어낸다.

깨끗해진 주방을 보며, 욕실로 간다. 아주 오래오래 이를 닦고, 하얀 거품을 내서 얼굴도 씻는다. 요즘 얼굴이 까칠하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훔치며 화장대 앞에 앉는다. 눈물이 난다. 죽고 싶은 순간, 나를 살린 동생을. 딱히 다정한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는 때 맞춰 힘든 나를 붙들어준다.

설령 그게 짬뽕이어도.


맵고 맛있는 짬뽕을 먹고, 집안 정돈을 하고, 속상한 이야기를 동생에게 털어놓고 나니 다시 살고 싶어졌다. 화장대 앞에 앉아 아주 잠깐 울었다. 그리고 동생 방에 찾아가 고맙다고 말했다. 어떤 미운짓을 해도, 결코 나를 미워하지 않을 가족이 있다. 나의 생에도 빛나는 날은 오겠지.


정말 죽고 싶었던 20대의 그날들에도, 그날의 너머에 꼭 좋은 날이 있을 것만 같아서 마음을 고쳐먹었었다. 좋은 날이 올 거야, 지금은 스스로 어깨를 두드려주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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