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아침, 투석을 받으려고 침대에 누웠다. 언제나처럼 굵은 바늘을 꽂고 누웠는데 묶은 머리가 불편해서 머리끈을 끌르느라 당겼다. 툭. 머리끈이 끊어졌다. 드라마에서는 이러면 꼭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는데...?
지잉. 차 사고 났어.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새해벽두부터 이 메시지는 뭐란 말인가! 손이 벌벌 떨리고 귀가 먹먹하다. 잠시 후 카톡으로 전송된 사진.
으악! 당장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라? 목소리는 멀쩡하다. 경찰이 출동했다며 일단 전화를 끊었다. 전후 사정도 알 수 없고, 차는 아주 찢어졌고.(차를 잘 모르는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찢어진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지잉. 이번에는 오른팔에 감아놓은 혈압계에 압력이 들어온다. 잠깐 핸드폰을 놓고 혈압측정을 한다. 삐삐삐. 투석기가 울린다. 간호사 선생님이 오더니, "혈압이 엄청 높아요. 수분을 더 걸어야겠어요."
(몸속에 잉여수분이 있을 때 혈압이 높아진다. 설날을 지나고 온 오늘은 이미 3kg의 수분제거 설정을 해두었기 때문에 더 올리면 안 된다. 그 이상은 내 체력으로 버티질 못하므로. 선생님은 내 혈압이 높아서 수분을 더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만, 이건 걱정 때문에 일시적으로 혈압이 높아진 상황이므로 그러면 안 된다.)
"아니 아니. 선생님, 이대로 두세요. 동생이 차 사고가 나서 지금 놀라서 높아진 거예요. 혈압이 얼마나 돼요?"
"혈압이 200도 넘어요."
정말 많이 놀라긴 했나 보다. 혈압이 200이라니... NBA 선수 키도 아니고 말이지. 평소에는 투석시간의 대부분을 수면으로 보내는 내가, 오늘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멍하니 눈을 뜨고 있다.
사고를 당한 일은 처음이라 가족 단톡방은 대책은 없이 걱정과 분노만 난무했다.
정지 신호에 맞춰 정차하고 있는 동생차를 뒤에서 일방적으로 들이받은 사고였기 때문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기도 하는구나 알게 되었다.
동생 회사는 대중교통으로는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위치에 있어서 자차가 아니면 출퇴근이 힘들다. 물론 회사 셔틀버스가 있긴 하지만, 동생은 남들보다 훨씬 일찍 출근하고 남들보다 늦게 퇴근하는 열정 사노비(..ㅋㅋ)의 표본이므로 셔틀버스이용은 힘들다. 오호통재라.
80대의 영감님이 정신을 잃으며 운전대를 놓쳐서 일방적으로 동생차 후방에 충돌한, 상대방 과실 100퍼센트의 사고. 경찰도, 상대방 보험사도, 운전한 영감님의 가족들도 출동했다. 동생은 그들 모두의 출동을 기다리고 일처리를 하느라 바로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
당장 차를 쓰던 사람이 차 없이 생활한다는 두려움에 동생은 일단 차 렌트부터 해서 연휴에 열려있는 꽤 규모가 큰 병원의 응급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장 3시간을 기다린 끝에 아주 간단한 진료와 약처방만 받을 수 있었다. 의사의 진단은 단순 염좌. 그러나 집에 돌아온 저녁, 허리와 종아리의 통증을 호소하는 동생에게 온찜질을 해주며 나의 걱정도 깊어진다.
사고당시 차선의 가장 앞에는 경차와 동생차가 나란히 서 있었고, 사고차량이 쌩하고 옆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상을 감지한 어떤 중년 운전자 분이 사고가 나겠구나 하고 따라와 보셨단다. 결국 사고차량이 동생차를 들이받았고, 중년의 운전자 분이 사고 상황 목격진술과 수습까지 도와주시고 홀연히 떠나셨단다.
만약 동생차가 아닌 경차를 들이받았다면 훨씬 더 큰 피해가 있었을 거라며, 만약 가해차량이 일반 승용차가 아닌 커다란 트럭 같은 거였다면 본인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하는 동생을 어쩌면 좋을까.
요즘은 연휴만 되면 가족들을 싣고 어디든 가려고 노력하는 동생은, 이번 설 연휴에는 가까운 강화도라도 다녀오자고, 다녀오는 엄청 맛있는 해산물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자고 했었다. 본인이 두어 번 가보았는데, 너무 맛있었어서 가족들 생각이 났단다.
사고가 나는 바람에 강화도를 못 가게 되어 어쩌냐, 너무 아쉽다고 그 소리부터 하던 동생에게 핀잔을 주었는데 내심 뿌듯했다.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는 다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구나 싶어서.
차를 산 이후로 늘 내 출퇴근을 시켜주는 동생. 그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모두 동생이 어쩜 그렇게 착하냐고 감탄을 하곤 하는데, 정작 나는 감탄하는 이들처럼 동생에게 고마워했던 적이 있던가.
때로는 주말에 약속이 있을 때에도, 내 퇴근을 시켜줘야 한다는 생각에 술은 거부하고 밥만 먹고 시간 맞춰 회사 앞에 나타나던 동생. 그간 인격적 성숙을 이루었는지, 요즘은 야근이 없을 때마다 퇴근하는 엄마도 모시고 오는 동생. 밖에서도 늘 사람들을 배려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동생. 그래서 비록 큰 사고를 당하긴 했지만, 몸에 큰 이상이 없이 사고 다음날인 오늘도 멀쩡하게 웃고 있다고 믿는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고, 또 이런 큰 사고를 겪었나 싶은 음력 새해의 연휴. 새삼 온 가족이 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순간이 바로 행복이구나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