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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Sep 19. 2023

000 챌린지의 시작

2023년 9월 19일


         2023년 9월 19일


나는 불성실하다. 불성실한 인간의 표본이다. 불성실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희귀 난치병'이라는 핑계에 쏙 숨어버리고 나면, 모든 불성실한 행동이 합리화된다. 이토록 비겁한 인간이라니!

성실해지고 싶어서 망설임 없이, 다른 생각 없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100일 글쓰기 챌린지 과정에 등록했다. 그리고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늘 마감을 필요로 했다. '마감'이라는 그 짧은 단어가 주는 적절한 무게감이, 나를 내리누르는 책임감이 필요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나처럼 글을 쓰고 있겠거니 생각하면 조금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성실한 스스로를 위해, 올해부터는 다이어리를 샀다. 학창 시절 꽤 오래 사용해 오던, 미국 아저씨 이름이 붙은 그 유명한 다이어리. 하루동안 해야 할 일들을 쭈욱 써두고 해결된 일을 하나씩 체크해 나가는 방식의 그 다이어리를 참 좋아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몇 년 간 사용하다가 궁핍한 생활에 계획성을 내다 버렸던 20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다. 그리고 영화처럼 희귀 난치병 환자가 되었다. 벌써 영화처럼 살아온 지 12년. 다시 계획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샀던 미국 아저씨 다이어리. 가죽 표지에 각인도 했다. 새해에 얼마나 표지를 쓰다듬었던가. 한두어 달은 표지만 쓰다듬었다. 그리고 봄이 오려던 때가 되어서야 조금씩 해야 할 일을 쭉 써두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하루를 시작할 때나 전날 밤에 미리 다음날의 할 일이나 업무를 기록해 둔다. 그리고 록키의 마음으로 하나씩 툭, 체크. 툭, 체크. 그렇게 하루를 완성해 나간다.

그래봤자 불성실한 인간은 챌린지에서 뒤처졌다. 일요일 8시에 퇴근을 하지 못해 챌린지 첫 강의를 듣지 못해, 휴일인 오늘에서야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엉덩이로 글을 쓴다. 내가 좋아하는 서민재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고 싶다면 종이와 펜 혹은 컴퓨터, 그리고 약간의 엉덩이만 있으면 된다."라고. 종이와 펜은 많다. 컴퓨터도 있다. 심지어 키보드, 블루투스 키보드까지 무려 다섯 대나 있다. 이제 엉덩이의 의지만 나를 따라와 준다면. 바닐라 라테를 마셔서일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왠지 엉덩이가 나를 따라와 줄 것도 같은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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