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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Sep 22. 2023

무능을 씻어내는 밤

2023년 9월 22일 금요일


2023년 9월 22일 금요일


오랜만에 꾸준히 글을 쓰고 있지만, 목표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밤이 되었다. 준비하는 일에 대해서는 또 내일의 내가 비약적 발전을 이뤄주길 빌며, 오늘의 무능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기 앞에 선다. 뜨거운 물로 무능 씻겨 내려가는가 싶더니 이내 몽글몽글한 기분이 몰려왔다.

저기 연보랏빛통의 바디샤워가 보인다. 엄마가 사다 놓은, 방판 아주머니들이 파는 비싼 바디샤워. 요즘에야 방판 아주머니들 아니라 인터넷 어디에서든 더 저렴한 가격으로도 살 수 있지만, 나 어릴 때는 아모레 방판 아주머니들을 통해야만 살 수 있던 물건들이 있었다. 그때 그 여성용 폼 클렌징도 그런 것이었지. 늘 엄마가 폼 클렌징이라는 걸 욕실 수납장에다가 숨겨두고 혼자만 쓰길래, 대장부인 나는 심술이 나서 몰래 꺼내서 쭈우욱 짜서 쓰곤 했다. 빌런도 그런 빌런이 없지. 까무잡잡한 얼굴, 왜 피부가 하얀 엄마를 닮지 않았는지 늘 불만이었다. 그걸 훔쳐 쓰면 나도 하얘질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정연이도 이제 여학생이 되었으니까 폼 클렌징 사용을 허락해 주겠다며, 아주 조금씩만 짜서 쓰라고 했던 그 기억이 이 밤을 덮친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폼 클렌징 소비자가가 2만 원이었다. 사실 엄마도 매일밤 꺼내서 짜 쓰는 것 같지는 않았고, 대체로 세숫비누를 쓰다가 특별한 화장을 했던 날 밤에만 얼굴을 꼼꼼히 지우느라 꺼내어 썼지. 엄마 자신도 무척 아끼고 아꼈는데, 난 뭐 대단한 거라고 엄마만 써? 하고 심술을 냈다. 짱구 만화에 보면 봉미선 씨가 고급 입욕제는 깊숙하게 숨겨두고 본인만 꺼내 쓰잖아. 그걸 본 빌런 짱구는 늘 미선 씨의 소박한 사치품들을 한 방에 욕조에 털어버리지. 앗, '정연이는 못 말려'였던가. 짱구야, 결국 너의 미래는 나로구나.

엄마는 결국 여학생이 된 나에게 여성용 폼 클렌징 함께 쓰기를 허락했다가 내가 지나치게 쭈우우욱 쭉 짜서 쓰는 꼴을 보더니 가정 내에서 고급 폼 클렌징을 단종시켜버렸다.

오늘 엄마가 사다 놓은 연보랏빛통 바디워시를 보니, 10대 때의 몽글몽글한 기억이 떠올라 서너 번 펌핑해서 그걸로 샤워를 해보았다. 엄마 꺼 훔쳐 바르면 다 좋은 줄 알던, 예뻐지는 줄 알던 시절이었지. 오랜만에 엄마 바디워시를 훔쳐서 씻어내면 꼭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아.

지금은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없는데, 참 이상하다. 늘 마음이 허기가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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