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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Sep 30. 2023

사계절의 취향


(008) 2023년 9월 30일 토요일


나는 취향이 분명하다. 어릴 때 김봉남 선생님(aka. 앙드레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은, 김봉남 선생님의 옷장을 열었을 때 똑같은 옷이 40벌 걸려 있던 광경. 사실 나도 좋아하는 옷이 있으면 계속 그것만 입고 싶어 하는 유형의 사람이라, 아예 똑같은 옷으로 옷장을 채운 김봉남 선생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멋져서 좀 반해버렸다.


누군가가 내게 "너는 뭘 좋아하니?"라고 물었을 때, 대답을 머뭇거리고 싶지 않아서 10대 후반부터 종종 스스로에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대답하는 문답식의 글을 쓰기도 했다. 정말 쓸모없는 짓 같지만, 나 스스로의 취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름대로 애를 쓴 것이다.


그런 나의 커피 취향은 달콤한 것, 사계절 아이스. 한때는 맥심 모카골드에 빠져서는, 뜨거운 물에 커피 믹스 두봉을 진하게 녹여서 물과 얼음을 잔뜩 추가한 커피를 먹곤 했다. 겨울에도 그 취향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실 뜨거운 걸 마실 바에는, 아예 먹지 말자는 게 내 신념이기도 하다.


나의 소중한 사람은 맥심 모카골드를 정말 좋아한다. 물리적 거리가 있다 보니 늘 전화통화를 길게 하는 편인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굉장히 맛있게 홀짝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 맛있게 홀짝이는 소리의 정체는 대체로 맥심 모카골드이고, 그는 항상 뜨거운 모카골드를 마신다. 내가 항상 아이스인 것처럼, 그는 따뜻한 것을 그대로 마신다.  처음에는 예삿일로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소리가 너무 맛있게 들렸던 나는 어느 날 따끈하게 모카골드 한 잔을 조제하였다. 그리고 호호 불어가며 호로록. 세상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겁고 고소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 후로는 꽤 자주 따끈한 모카골드를 마신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물론 밖에서 커피를 사 마실 때는 여전히 무조건 아이스다. 영하 10도의 날씨에 장갑도 안 끼고 벌벌 떨며 걸었던 어느 겨울날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커피를 마신 적이 없다. 나의 취향은 여전하기도, 좀 다른 방향으로 튀기도 했다. 정말 사람 일은 이렇게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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