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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Oct 16. 2023

타인의 취향


(024) 2023년 10월 16일 월요일


투석은 꼬박 4시간 동안 바늘을 꽂고 누워 있어야 한다. 4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순전히 개인의 체력과 취향차이다.

25살에 처음 투석을 시작하던 때의 나는 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밤새 잠을 못 잔 상태로 투석을 하러 병원에 왔더라도 낯선 병원침대에 누워 있는 일은 어색했다. 사방이 뚫려있고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 손에 쥔 것은 낡은 아이폰뿐.

인공신장실은 모든 침대에 개인 티브이가 달려있다. 그 티브이에 각자의 이어폰이나 헤드셋을 연결해서 그걸로 4시간 동안 티브이를 보는 것이 대부분 환자들의 4시간 보내기다. 나 역시 몇 번은 인공신장실의 헤드셋을 끼고 티브이를 보기도 했지만, 만천하에 나의 취향이 공개되는 것이 불편했다. 무엇보다 누워서 침대에 매달려 있는 티브이를 쳐다보는 것은 목의 엄청난 통증을 동반하는 일이어서 그 일을 금방 그만두었다.

그리고 택한 것은 손에 쥔 낡은 아이폰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 한때는 핸드폰으로 심슨 게임도 하고, 티브이 앱을 다운로드하여서 내가 좋아하던 드라마 영애 씨를 보며 웃기도 했다. 신문 기사도 보고, 웹툰도 보고. 낡은 아이폰이 4시간을 버티기에는 체력이 지나치게 부족해서 남들보다 먼저 보조배터리를 사서 쓰기도 했다. 나름 보조배터리계의 선구자였던 셈. 그러나 왼팔은 기계에 묶여 있고, 안타깝게도 나는 남들보다 손이 작다. 작은 손 하나로 핸드폰을 쥐고서 4시간을 버티는 일이 너무도 고단하게 느껴질 때 즈음, 다니던 병원이 옆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최연소 환자로 모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정연은 미리 수선생님을 졸라 '창가자리'를 얻어냈다.

새 병원에서 VIP석에 눕게 된 이후, 나는 그냥 모든 것을 놓았다. 창가자리에서 밖의 풍경을 보는 일을 즐기다가, 결국 그냥 고단한 4시간 동안 숙면을 취하기로 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나는 10년 차 투석 환자가 되었다. 10년 차에 새로운 병원으로 옮겼다. 오래된 병원이지만, 확장이전을 하자마자부터 다니기 시작해서 시설이 아주 깔끔하고 좋았다. 이번에는 티브이가 천장매립형이었다. 새 병원의 원장님은 내 곁에 서서 이 최신 시설에 대해서 얼마나 자랑을 했던지 모른다.

그래도 보지 않던 티브이를 갑자기 10년 만에 보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또 누워서 푹 잠을 잔다. 참 우스운 것이 나는 티브이를 보지 않는다. 고개를 좌로 돌려도, 우로 돌려도 모든 어르신들이 티브이를 보고 계신다. 그리고 깨어있을 때, 남의 티브이 화면을 보는 새로운 재미가 생겼다. 새 병원의 내 자리는 26번. 고등학교 2학년 때 번호랑 똑같아서 웃음이 났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할저씨가 한 분 누워 계셨는데, 볼 때마다 채널이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영화를 무척 좋아하시는지 자주 영화채널에 멈춰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누워 계셨는데, 투석하다 깨어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늘 전원일기. 단 한 번도 다른 프로그램이었던 적이 없다. 무조건 전원일기. 혼자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나는 기계에도 취향이 있다. 독일 F사의 투석기계보다는 B사의 기계가 내 몸에는 잘 맞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B사 기계가 있는 33번 자리로 옮겼다. 침대줄의 제일 끝이라, 이제 타인의 취향을 구경하는 일은 왼편 침대의 할머니 것이 유일하다. 할머니는 늘 옛날 드라마를 방영해 주는 채널만 보신다. 그렇게 호통치는 여인천하 속 전인화 아줌마를 보고, 상투를 튼 허준 전광렬 아저씨를 만난다. 어쩜 다들 저렇게 젊을까. 신기한 마음으로 소리도 나지 않는 무성영화를 보듯 자주 타인의 취향을 훔쳐본다. 벌써 할머니 곁에서 여인천하, 허준, 이산, 상도 등 수없이 많은 드라마를 보았다.


나는 여전히 티브이를 절대 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고 잠을 푹 잔다. 각자의 취향이란 정말 재미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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