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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반한 순간.

by 이정연


(036) 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사실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세심하고 낭만적인 사람인 것 같아서였다. 이정연은 이정연에게 인심을 잃지는 않았었는지,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 언저리에는 '남자 이정연'이 이상형이었다. 물론 외모적인 건 절대 아니고(이정연처럼 키가 작고 귀여운 외모의 남자를 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속이 '이정연'인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운명적 사랑을 믿고, 상대방의 아주 사소한 것도 기억하는 그런 낭만적인 사람. 지극히 상식적이고, 고지식하며 지적이기까지 하면 참으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술과 담배도 안 하고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적인 것만 빼면 모두 이정연을 설명는 특질이다.


그런데 그는 이정연이었다. '나는 투석하는 일을 내 목숨을 구하러 가는 사명으로 여긴다. 그러니 투석을 하러 오고 가는 일은 나의 출퇴근이라 생각한다'라고 쓴 문장이 있었다. (대략 그런 내용의 문장이었다. 오래전 글이라 기억이 확실치 않다.) 그는 그 문장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에게 보내는 메일 제목을 이렇게 써서 보냈다. "퇴근은 잘 하셨나요?"


이전에 보냈던 메일들도 있었지만, 사실 그날의 메일 제목 때문에 그에게 반했다. 그즈음 병원에 다녀와서 집에 도착하면 2시 정도가 되었는데, 그 메일이 도착한 시간도 딱 그때였다.

병원 다녀올 시간에 딱 맞춰서, 병원 잘 다녀왔냐는 말을 '퇴근 잘했냐'로 바꿔 묻는 남자라니... 메일 제목에 1차로 반하고, 메일 도착시간에 2차로 운명을 느다.


그렇다. 당신이 짐작하듯 당시의 나는 F였다. 그리고 나는 그도 당연히 F일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러나 MBTI 검사해서 알려주세요, 했더니 돌아오는 답은 IXTX였다. 그러더니 정말 그 후, T 같은 말과 행동만 골라하기 시작했다. 분에 그를 만나는 동안 나도 F에서 T가 되었다.(MBTI와 별개로 그는 이해와 공감은 무척 잘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나를 위해 매우 노력하는 것 같다.)


우리는 처음에는 달라서, 나중에는 똑같아서 수도 없이 싸웠다. 그리고 나는 그와 싸우는 것이 너무 좋았다. 물론 때로는 소모적인 다툼이 진절머리 나게 싫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와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연애를 처음 하는 20살 같은 나의 사고방식과 이미 성숙한, 삶의 많은 일을 겪어본 40대 남성의 사고방식은 매번 부딪혔다.

애를 해보니, 더욱 나 자신의 단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시위를 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시비를 정말 잘 건다. 이정연이 정말 이런 인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뭔가 기분 나쁜 것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무조건 입을 꾹 다물거나 비논리적으로 우기기. 그리고 '나는 연애 안 해봤으니까 당신이 봐줘야지, 귀엽고 착하니까 봐줘야지.'등등의 되지도 않는 주장을 했다. 제기랄. 저런 얘기를 하다니... 나조차 이정연과 헤어지고 싶다.


하여간 세상에 대단한 낭만이 있는 줄 알았고, 대단한 운명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 없더라. 특별한 사건, 특별한 인연으로 엮여 만나더라도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려면 어마어마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더라. 그리고 '정연아, 네가 우주에서 제일 예뻐.'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남자가 있는 줄 알았더니, 세상에 태어나 그런 남자는 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동생이자 인생 선배인) 나무의 이야기였다.

그래, 나는 사랑을 드라마와 영화로만 접했다. 그거 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만든 거니까, 남자주인공이 실재하는 줄 알았지 뭐니. 그 누구도 그게 환상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 나의 나약한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어도 괜찮은 유일한 사람, 그의 약한 이야기를 들어도 기꺼이 나의 온 마음을 쓰고 싶은 사람.

수천번 '공유보다 멋있다.' '공유 몇 트럭을 갖고 와도 당신 하나와는 바꾸지 않는다.'는 거짓말 같은 나의 진심을 말했지만 단 한 번도 믿어주지 않은 사람. 말을 꾸며내어 예쁘게 할 줄 모르는 점이 가끔은 화가 나고 섭섭해도, 그럼에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사람을 지금 4년째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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