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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삶

by 이정연


(028) 2023년 10월 20일 금요일


눈을 뜨니 밤 10시가 되었다. 나는 알고 있다. 설거지는 그대로 있으리라는 것을. 내가 아니면 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늘 알고 있다. 그러니 또 일어난다. 다른 일을 제쳐두고 설거지부터 해야 한다.


딸은 출근해서 오늘 집을 비웠고, 아들은 제시간에 퇴근을 하지 못했다. 야근이 잦고, 팀원들과의 식사 약속도 많다. 오늘은 제시간에 퇴근하려고 나오는데, 수석 총괄님에게 잡혀서 전산업무를 했단다. 아들은 얼마 전 총괄팀장으로 승진을 했다. 아들도 딸도 모두 고단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엄마인 내가, 그나마 평일에 병원 가는 일 외에는 별일 없는 정연엄마가 집안일을 책임져야지.


어느 날은 화가 나기도 하는 엄마의 삶. 나도 버는데, 왜 살림은 내가 다 살고 있는가. 왜 우리 아들딸들은 그릇을 물에 담가놓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돌이켜보면 과거의 엄마는 아주 오랫동안 가장의 역할을 했다. 무책임한 아빠. 사회에 나가기엔 어린 자식들. 엄마 혼자 벌어서 그 쥐꼬리만 한 월급을 토막 쳐 살아가던 날들이 생각난다.


지금 엄마로 살아가는 나는 그렇게까지 힘겹지는 않다. 그릇을 물에 푹 담가놓지 않는 아들 딸의 모습을 보면, 1990년대 중반의 내가 떠오른다. 밥 먹고 식탁을 닦지 않는 아들에게 좋은 투로 잔소리를 하면서, 또 1990년대 중반에 밥 먹고 식탁을 닦지 않았던 동생과 나를 생각한다. 정말 수백 번 좋게 말하니, 요즘 아들은 꽤 신경 써서 식탁을 닦는다.


그래도 내가 청소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그 상태로 두는 아들과 딸을 내가 돌봐야 한다. 어디든지 내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욕실청소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 아니면 하는 사람이 없다. 늘 깨끗했던 대구집의 욕실을 생각한다. 딸이 고생 참 많았겠구나...

하루 계획의 대부분이 집안 살림이다. 이제는 최적의 동선으로 집안 관리를 한다. 고작 이 생활 1년인데,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 화가 나고 힘이 들었던가.


화나고 힘들어도, 엄마의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은 없다.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 낮 동안 딸은 나를 무수히도 많이 불러댄다. 딸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깔깔 웃어도 주고 추임새도 적절히 넣어주어야지. 그리고 집안일도 해야 한다.

모두 잠든 시간이 되면 해방감이 들면서, 미뤄두었던 강의도 듣고 책을 읽기도 한다. 간밤에는 그러면서 새벽까지 심야영업을 하는 카페에 바닐라 라테를 시켜서 혼자 마시기도 했다. 이럴 때는 K장녀의 문간방 생활이 괜찮다. 배달된 커피를 아주 신속하게 방으로 들여올 수 있다.

그렇게 밤샘을 하고 오늘 이른 아침에 시스템 교육을 받으러 갔었다. 이미 실수를 두 번 했었기에,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긴장을 했나 보다. 교육받고 집에 돌아와서 빨래를 하고 나서 지쳐 잠이 들었었다. 그러고 일어나서 또 밀린 집안일을 다 해두고,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한 생각이 나서 혼자 밥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과 하루 이야기를 나누고, 소중한 사람과 저녁시간에 또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고 또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또 나를 기다리는 설거지를 하고서야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오늘 정연엄마는 글은 쓰지 못했다. 책은 밖에 나갔을 때 읽은 것이 전부다. 그러니 또 잠을 안 자고 이러고 글을 쓰고 있는게지.


63세 우리 딸이 살아온 그 길고 긴 주부로의 삶, 엄마, 아내로서의 삶을 생각한다. 나야 말만 엄마지, 사실 무척 많은 자유가 보장된 홀몸이 아닌가. 우리 딸은 엄마로 살아오던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았을까. 지금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을 생각한다. 정말 엄마의 삶을 살기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모든 주부이자 엄마들의 희생하는 삶. 당신들 모두를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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