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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Oct 26. 2023

자세히 보면 예쁘다

너도 그렇다

(033) 2023년 10월 26일 목요일


가끔 투석 후에 저혈압 상태가 될 때가 있다. 지난 2년간은 좀 자주 그랬다. 사실 그래서 저혈압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냥 집에 무사히 가서 드러누워 쉬면 되는 것을, 심각할 것이 뭐가 있어. 쉬면 다 괜찮아져.


그날도 그랬다. 끝날 즈음 저혈압이 왔고, 선생님들이 걱정을 했지만 나는 씩씩한 척 대기실로 나와 체중을 재고 체중이 기록된 종이를 선생님에게 제출하고서는 금세 대기실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이게 심박수가 빠른 게 느껴질 때, 내가 늘 하는 자세다. 언젠가 친한 간호사 선생님이 의학서적으로 공부하다가 보셨단다. 심장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일 때는, 쪼그려 앉기를 하면 안정이 된다,는 문장을.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는데도 미리 쪼그려 앉기를 스스로 처방하여 대처하고 있었던 터라 선생님이 대단하다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심장에 과부하가 걸려 숨이 찰 때, 난 쪼그려 앉는다. 그날도 그렇게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J선생님에게 딱 걸렸다. "정연씨, 힘들어?"

그러더니 혈압계를 가져와서 대번 내 팔뚝에 감아버렸다. '87/62' 맙소사. 나도 이 정도로 혈압이 낮을 줄은 예상을 못했다.


그 길로 보디가드들의 보호를 받는 슈퍼스타처럼 어느 선생님은 나를 잡고, 또 어느 선생님은 앞장서서 길을 텄다. 그러더니 빈 침대에 나를 눕혔다. "정연씨 무조건 누워서 쉬다가 가야 해. 근데 혈압이 너무 낮다. 오늘도 공복이죠? 이럴 때는 뭐든 마시고 먹어야 하는데. 비타민 음료 줄까? 아니면 커피?"

치프인 박 선생님이 메뉴를 마구 읊으신다. 난 비타민 음료는 본디 마시지 않으므로, "선생님 저는 커피요." 당당하게 주문을 했다. 선생님은 간호사실에 있던 원빈 커피를 가져와서 따 주고, 쿠키 봉지를 까서 손에 쥐어줌과 동시에 마스크를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얼른 먹으라고 옆에서 마음을 써주었다.


이게 저혈압이면 좀 심각하고 울적해야 하는데, 완전 VIP 대접을 받으니 되려 기분이 좋았다. 이 병원으로 옮긴 지 2년, 그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는 이정연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들 달려들어 나를 신경 써주고 챙겨주니까 몽글몽글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열심히 쿠키를 씹고, 커피를 꼴깍꼴깍 마셨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뜨거운 눈길을 받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저혈압 사건이 발생하고 바로 그다음 주, 치프인 박 선생님이 내 니들링을 해주러 아침에 왔다가 작게 속삭였다.

"정연씨, 정말 예쁘게 생겼더라. 나 사실 지난주에 정연씨 얼굴 처음 봤거든~ 정연씨 그렇게 예쁘게 생긴 줄 몰랐어서, 마스크 내렸는데 깜짝 놀랐잖아~"

"앗, 진짜로요? 아, 그러네요. 코로나 시대여서 우리가 계속 얼굴을 모르고 있었군요."

"저혈압 와서 쿠키 먹고 있는 사람한테 얼굴이 예쁘다고 말하기는 좀 그래서.. 가만있다가, 오늘 만난 김에 얘기하는 거야~"

선생님한테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는지 모른다. 간호사실에 있는 간식을 꺼내다가 다정하게 챙겨준 것도 고마운데, 요즘 특히 얼굴이 미워 보인 적이 많아서... 누군가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환하게 피어났다.


그러고 나서 또 며칠 후, 안경을 벗고 얼굴에 색칠을 살짝 해야 될 날이 있었다. 나를 예쁘게 봐준 박 선생님이 너무 고마워서, 치료 끝나고 바로 병원을 떠나지 않고 간호사 데스크에 잠시 얼굴을 비췄다. 오늘은 특별히 화장도 하고 안경도 벗었으니 보시라고, 푼수짓을 하러 간 거지. 갔더니 수 선생님과 또 다른 치프선생님까지 모두 모여있기에, 수줍게 박 선생님의 어깨를 톡 쳤다. 갑자기 또 정연이 얼굴 예쁘다, 예쁘다 하는 분위기가 되어 다른 치프 선생님이 장난스레 내 마스크를 내려버렸다. 2년 간 늘 데면데면하게 느꼈었는데, 나를 정연이 정연이 하며 귀여워해주시는 이 분위기가 꼭 10년을 함께한 예전 간호사 선생님들 같아서 코 끝이 찡해졌다.


나는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 나도 김태희나 송혜교, 전지현 같은 미인이 아니고, 단순히 그런 미인을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나다 보면 표정이 밝고, 말하는 것이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과 만나다 보면 '저 사람 참 예쁘네'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외모가 깎아낸 듯 예뻐도, 정말 정이 뚝 떨어지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그런 사람은 예뻐 보이지 않는다. 점점 얼굴이 추해 보인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그러하다. 모두 예쁘다. 자세히 보면 예쁘다. 나도, 그리고 당신도.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자꾸 만날수록 예뻐 보이는 그런 당신들이 참 좋다. 나도 누군가에게 점점 더 예뻐 보이는 사람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지막 보이차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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