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2023년 10월 31일 화요일
우리 동네 전철역에 에스컬레이터가 생긴 이후로, 나는 절대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새파랗게 젊은것이 어르신들 사이에 끼어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아주 가끔 사나운 눈길을 받기도 한다. 속으로야... 이 중 내 장기가 제일 제 기능을 못할걸요? 하고 어르신들에게 덤비지만 현실의 이정연은 얌전하다. 그냥 조용히 큰 사고 없이 살아가고픈 소심한 이정연이다.
역사에 올라와서 밖으로 내려가는 것은 계단과 엘리베이터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어제는 기운이 없어서 계단으로 쿵쿵하고 내려가지를 못하겠는 거다. 눈치를 보고 샤샤샥 엘리베이터로 갔다.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았던지 엘리베이터 내부에 안전바를 잡고 쭈그려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그러자 옆에 서 계시던 할머니께서 다정하게 등을 쓸어주시며, "많이 아퍼?"하고 말을 건네주셨다. 감사해서 목례를 하며 대답을 했다. 외투를 통해서도 할머니의 따스한 손의 온도가 느껴졌다.
새파랗게 어린것이, 하는 눈빛에 익숙하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할 때도 조금은 과장된 연기를 한다. 나는 새파랗게 어린것이지만, 많이 아픈 어린것이니까 너무 고깝게 보지 마세요. 그런 메시지를 담은 애처로운 눈빛과 표정, 기운 없는 몸짓. 아픈데도 바보처럼 씩씩한 척 걷는 것보다는, 조금 과장된 연기를 곁들이더라도 아픈 티를 내고 조금이라도 편해지는 것이 낫다.
옆 사람에게도 관심 끄고, 지극히 개인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지금의 세태가 편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옛날이 그리울 때도 있다. 그렇게 친절한 할머니를 만나고, 마음 써주신 것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지도 못했는데 벌써 나와는 다른 건널목으로 건너 사라지셨다. 길을 건너러 가다가, 길을 건너는 도중에, 또 길을 건너고 나서도 한참을 할머니를 찾았다. 한참을 마음이 따뜻했다.
자꾸 밤이 되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코든 목이든 불편해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또 가위에 눌려서 식은땀을 두 바가지를 흘렸다. 그러고 깨어났다. 오전 10시에 대학병원 외래진료가 있는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왕복 서너 시간을 전철에서 못 버티겠다 싶어서 오전 8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바로 전화를 했다. 큰 병원이라서 상담사님이 전화를 받아서 예약 변경을 해주시는데, 내가 부탁을 드리기도 전에 알아서 말씀을 하신다.
"11월에는 24일 오후하고 28일 오전이 있네요. 어느 날로 바꿔드릴까요?"
"28일 오전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28일 오전 8시 51분으로 예약을 변경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고생하셔요."
그날의 첫 진료구나. 서울 강남까지 가려면 정말 새벽같이 나가야겠구나. 이른 진료시간에 좀 뜨악했지만, 내가 무언가 부탁드리기도 전에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됨에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고생하시란 한마디를 덧붙였을 뿐인데, 상담사님이 무척 기분 좋아하시는 것이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더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나에게 또 감사하다고 하신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따뜻한 말 한 마디의 힘이 참 크다.
낯선 분이 나에게 건넨 한 마디, 또 내가 누군가에게 건넨 한 마디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환하게 밝히는지. 서로에게 친절해질 마음의 여유를 조금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