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개안을 한 것 같다. 그동안 노트북 화면만 보다가, 다시 30인치에 육박하는 데스크톱 모니터를 보니까 화면이 너무 커서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다. 이거... 각막나이 60대인 나(녹내장 환자중에 아마 가장 작고 귀여울 것으로 예상됨)에게도 참으로 부담스럽다.
데스크톱이 데스 했다고 혼자 웃었는데... 부활하셨다.
지금까지는 데스크톱에게 쉴 시간을 준 적이 없는데, 아마 그런 탓이었을까. 열흘쯤 푹 쉬고 났더니 이 친구 살아나버렸다. 기계든 사람이든 이토록 휴식은 중요하다.
지난 일요일은 엄마 생신이었다. 고민 끝에 브랜드 패딩을 미리 샀었다. 가장 작은 사이즈를 샀는데도, 엄마에게 입혀놓으니 너무 커서 속상했다. 요 1년 사이 그 작은 몸에서 3kg이 더 달아나버렸다. 생신 선물은 현금봉투로 바뀌었다. 급하게 예쁜 봉투를 사서 현금을 채웠다.
이번 생신은 어쩐 일로 당일에 외식을 하고 싶다고 하셔서, 일요일 퇴근길에 동네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고 들어오기로 약속을 했다. 나도 그 순간을 위해 수분관리를 하느라 어느 끼니는 굶어주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일요일 저녁, 주차되어 있는 정남의 차를 보자마자 냉큼 탔다. 누나 카톡 확인 안했냐고 정남이가 뭐라고 한다.
"엄마가 허리를 못 펴신다. 지금 응급실 가야 할 거 같아."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까 이른저녁부터 갑자기 소변을 보지 못하고, 옆구리가 아프다고 하셔서 난리가 났었단다. 뒷좌석에서 엄마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진다.
정남이 차는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내달린다.
"정연이 고기 먹으려고 굶어서 배가 고플 텐데... 저녁을 어떡하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그렇게 아파서 난리면서. 사람이 먼저 살고 봐야지!"
엄마의 증상에 관해 핸드폰을 쥐고 검색을 한다. 요사이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었다. 제발 큰일은 아니기를 빌며 응급실까지 달렸다.
응급실 입구에서 예진을 하는데, 세상에 수축기 혈압이 203이다. 얼마나 통증이 심하면 저토록 혈압이 높으실까. 엄마는 옛날부터 몸이 아파도, 얼굴이 멀쩡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아프다고 말해도 마음은 좋지 않지만, 아프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때도 어찌나 얼굴만은 멀쩡한지... 우리 집 사람들이 다들 아픈 것을 잘 참는 편이고, 호들갑을 떨지 않아서 엄마가 예진실 의자에서 자꾸 아프다며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통증이 많이 심하신가 보다 하였다. 제발 미간을 좀 찌푸려주세요.
응급실에는 보호자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처음에는 정남이가 엄마와 들어갔다. 그리고 엄마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나오시면서 내가 보호자로 교대했다. 엄마의 가느다란 팔에 바늘이 들어갔다. 수액과 진통제 두 봉이 매달렸다. 새우처럼 굽어져 있던 엄마의 몸이 조금씩 펴지는 듯했다. 혈액검사를 한다고 피를 뽑아갔고, 다행히 소변검사 검체도 제출해 놓았다. 자꾸만 나와 정남이 배고픈 걸 걱정하는 엄마, 사실 속이 비어서 퍽 힘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잠깐 혼자 계셔도 괜찮을지 엄마에게 묻고 또 물었다. 진통제 주사가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간호사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놓고 응급실을 나왔다.
벌써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불안하지만, 이 종합병원 근처는 아는 동네다.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정남이와 길을 나섰다. 6년 전까지는 근처 동네에 살아서 엄마와 종종 오던 목욕탕이 바로 옆에 있다. 근처의 만둣가게에서 왕만두를 자주 사 먹곤 했다. 그 집 생각이 나서 정남이에게 만두를 먹자고 했다. 홀 영업은 끝이 났고, 포장은 된다고 하셔서 고기, 김치왕만두 2인분씩을 각각 포장하였다. 워낙에 밥을 좋아하는 정남이인지라, 만두를 포장해 오는 길에 있는 24시 국밥집에서 부대찌개를 사주겠다고 했는데 엄마를 걱정한 정남이가 거부했다. 만두는 내일 먹으면 되니까 든든하게 밥을 먹자, 해도 도리질을 한다. 밥 성애자가 저토록 밥을 거부하다니. 정남이 너는 정말 효자구나.
병원 앞마당 벤치에서 먹기에는 날이 너무 차서, 차 안에서 만두를 우적우적 씹었다. 내가 마지막 만두를 씹는 동안, 정남이는 먼저 엄마에게 가보겠다며 차를 나섰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저 멀리 나타나 차로 다가오는 엄마와 정남이.
혈액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고 했는데, 수납을 마치고 혈액검사 결과지까지 받아 들고 돌아왔다. 큰 이상은 없으니 가도 된다고 했단다. 요로결석이 의심되니까 다른 병원에서 꼭 CT를 찍어보라고 아까도 응급실 선생님이 말씀하셨었다. 종합병원인데 이곳에서는 CT를 찍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뇨기과가 있는 종합병원을 미리 검색해두었다.
엄마의 혈액검사 결과지를 받아 들고, 결과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문제 있는 부분은 없다. 특히 나는 혈액검사 결과지를 볼때 콩팥 관련 수치를 가장 면밀히 살핀다. 그런데 콩팥이 기능을 잘하고 있네...? 정말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웬만한 혈액검사 결과지는 다 읽을 줄 안다. 가족들은 우리집에 의대생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농담을 한다. 처음 아팠을 때, 내가 나의 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밤을 새워서 공부했었다. 그런 시간이 이런 때 다 도움이 되는구나.
그 사이 엄마는 조금 살아났다. 일단 큰일이 아니어서 안심이 됨과 동시에 엄마에게 고마웠다. 크게 아픈 게 아니어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프지 않은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부모의 심정을 또 알 것 같다. 생신 날 응급실에 가시다니. 정말 안타깝다. 둘이 길을 걸으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정남이가 몇 번을 말했던가. 그 안타까움에 셋이 둘러앉아 미리 사다 놓은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저녁에 고기 먹을 생각에 부풀어 있었을 엄마도 속이 텅텅 비어있어서인지 케이크를 잘 드셨다. 내 케이크 조각 위에 있던 딸기도 엄마 접시에 얹어드렸다. 아기처럼 양보받은 딸기를 다 드신다. 평생 자식에게 내어주기만 하던 엄마가, 작년부터 아주 소소한 것들에서 이기적인 모습을 본다. 그래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는 내가 정연엄마가 되어 맛있는 것을 늙은 딸에게 덜어주고 양보한다.
지금까지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받기만 했으니까, 이제 남은 세월 조금 양보하고 덜어주는 정연엄마로 살아도 괜찮겠다고 자주 생각하고 웃는다.
엄마와 다른 종합병원에 갔다. 온갖 검사를 다 받고, 결국 요로결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더니 과장님이 날더러 눈짓을 하셔서, 다 같이 과장님 곁에 서서 지금 상태와 시술에 관해 자세히 설명을 들었다. 하필이면 금요일 오전 시술. 엄마가 혼자 병원에 올 수 있을까. 무서울 텐데.
"혼자서 오시는 분들도 많아요."
담당 간호사 선생님은 그리 말씀하셨지만, 생애 처음으로 이런 일을 겪는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나도 태어나 처음으로 MRI 찍을 때는 참 많이 겁이 났었다. 당시에 엄마와 제일 친한 친구 둘을 달고 갔었고, 전날 밤에도 소중한 사람한테 무섭다고 난리를 쳤다. MRI실 들어가기 전까지도 소중한 사람에게 카톡으로 멘털 케어를 받았었던 걸 생각하면 엄마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진과 통화하다가 엄마가 요로결석 진단을 받았다고 하니 아주 난리가 났다.
"정연아. 남자들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는데, 어머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어. 시술은 또 얼마나 아플까..."
누가 보면 진진이 딸인 줄 알겠다. 진진의 따스한 걱정이 계속 마음에 남은 상태로, 퇴근한 정남이와 엄마 시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남이가 연차를 쓰고 엄마를 케어하기엔 너무 급작스럽다. 그리고 요즘 정남이네 회사가 비상근무 중이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
그리고 마침 이날 처음으로 정남이가 해고통지를 했다. 지금까지는 정남이의 상사께서 해고관련된 일을 모두 처리하셨는데, 이번에는 정남이에게 맡기셨단다. 그래도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시던 분이었는데, 소속팀 팀장과의 불화로 그분이 사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정남이의 어깨가 축 쳐진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큰 회사에서 너무 많은 일을 짊어진 정남이.
"걱정 마. 누나가 내일 투석시간을 미루는 전화 할게. 금요일에 누나가 엄마 모시고 가면 되니까, 정남이는 아무 걱정 말거라."
그래도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같이 헤쳐나가야지. 살아보니, 내게 가장 따뜻한 사람은 결국 가족이더라. 그 오랜 세월 나를 견뎌주고, 또 앞으로도 나를 견뎌줄 그 마음들을 외면하지 말아야지. 그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아야지. 요즘 지나간 날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20대의 나를 지켜주었던 가족들의 사랑을 돌이켜 보았다.
결국 살아 있다 보니, 모쏠인 내가 소중한 사람도 만나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좋은 일도 많이 만났다. 그러나 만약 가족들이 없었다면 나의 생에 30대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속 썩이는 팔춘기 딸에게도 조금 더 다정해져야 할 텐데. 데스크톱이 살아났듯이, 나의 다정함도 좀 살아난다면 좋겠다.
얼른 한숨 자고, 아침에 빨래 널어놓고 설거지해 두고 딸의 손을 잡고 병원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