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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언니와 나 1

by 이정연


신도시 역에 내렸다. 원래 이 역 근처는 휑 하니 뭐가 없었다. 버스 정류장만 덩그러니 있던 곳이었는데, 오랜만에 여기에 내렸더니 역 주변 비어있던 땅에 브랜드 아파트 여러 동이 삐죽이 올라가고 있었다. 놀랄 노자다. 정말이지 도시는 끊임없이 팽창하는구나 싶어 신기하면서도 씁쓸했다.

역 바로 앞의 브랜드 아파트라니, 사실은 누군가가 내게 거액의 상속금을 남겨주면 좋겠다. 그 돈으로 한 채만 매입하면 좋겠다 싶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어른이 아무도 계시질 않는구나 하하하.


참으로 별스런 생각을 하며, 구름다리를 내려가서 버스 정류장에 섰다. 서자마자 익숙한 마을버스가 내 앞에 멈췄다. 몇 년 동안 타고 다니던 익숙한 마을버스지만 이젠 타고 다닐 일이 아예 없어서 살짝 무섭지만, 당당하게 올라탄다.

익숙한 듯 낯선 신도시의 건물과 단지 사이사이를 이리저리 돌고 있는 버스. 이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가장 친한 친구 나무의 동생부부가 사는 아파트도 있고 친한 친구 소소네 아파트도 지나간다. 많은 친구들 생각이 난다.


10분쯤 달렸을까, 정류장에 내린다. 횡단보도를 향해 길을 다시 걷는다. 길을 건너서, 잠시 다이소에 들렀다. 준비해 온 선물을 담을 작은 쇼핑백이 필요하다. 2층까지 올라가서 500원짜리 쇼핑백을 하나 골라 계산하는 사이에 전화가 걸려왔다. 영언니다.




지금의 병원을 다니기 이전의 병원에 10년 가까이 다녔다. 영언니와는 그 병원에서 만났다. 인공신장실은 늘 10여 명 이상의 간호사 선생님이 계셨고, 영언니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를 스쳐간 수많은 선생님들 중에서도 유난히 마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내가 까무잡잡해서인지 피부가 하얀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영언니는 내가 본 중 가장 하얗고 어여쁜 사람이었다. 참으로 얌전해 보이는데, 바늘을 찌르는 그 길지 않은 시간 혹은 지혈을 하는 시간 동안 나를 만날 때마다 박장대소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수백 개의 손을 거치며 알게 된 것은, 사람마다 손 끝의 온도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똑같이 굵은 바늘로 내 팔을 찔러대지만, 손 끝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있다. 아무리 말은 다정하게 하여도, 손 끝이 매정한 사람이 있다. 영언니는 내가 만난 수백 개의 손 중에서도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이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그만두고, 또 새로운 분이 오시고.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인공신장실에서 영언니만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정연이'라는 다정한 호칭, 동생처럼 생각하는 진심. 그러나 같은 병원의 간호사와 환자 사이에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우리는 서로 생각했다.


그리고 어차피 매일 만나는 사이였다. 그러다 2021년 가을 내가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때 이별을 가장 슬퍼한 것도 영언니였다.

그런 영언니가 어느 날 나의 SNS를 발견해 냈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연결되었다. 이제 각자 다른 곳에 속해있으니 마음에 걸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번 우리는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내가 그리 개차반은 아니구나, 생각하며 웃었다. 10년 동안 정말 매일 같이 얼굴을 마주했던 언니인데, 헤어진 이후로도 나를 지긋지긋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 꺼이 나와 개인적 관계의 영역으로 들어서겠다고 결심한 것이 기쁘고 고마웠다. 끊어지면 끊어지는 대로 두고픈 관계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언니와의 데이트를 하러, 팽창하는 신도시로 왔다. 이제 막 신장실 근무가 끝났을 영언니를 맞이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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