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언니는 내게 부재중 전화와 카톡 메시지 하나를 남겨두었다. 근무 끝났으니까, 곧 내려가겠다는 내용이었으나 나는 기어이 4층으로 올라왔다.
12년 만에 병원은 이름이 바뀌었다. 사실 1년 전이었나, 병원은 다른 의사 선생님이 인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름을 바꾼 모양이다. 세상 모든 것은 이렇게 변하는구나.
영언니와 나는 종종 통화를 한다. 각자 마음 답답한 일이 생길 때, 편안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다. 내가 병원을 떠난 후, 영언니는 인공신장실의 수선생님이 되었다. 그래서 1년 전, 다시 영언니에게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을 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버스, 전철, 또다시 버스를 타야만 하는 복잡한 환승과정을 버텨내기가 힘들 것 같았고, 내가 원하는 치료 시간대에는 자리가 없어서 포기했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개인적인 관계에만 머무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서 조금만 걸으면, 카페와 맛집들이 늘어선 조용한 주택가가 나온다. 우리는 걸어서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함께 걸으면서부터 언니는 내 팔짱을 끼려다가, 슬그머니 손을 잡는다. 우리의 모습이 소녀 같아서 웃음이 났다. 손을 잡고 걷는 삼십 대의 정연과 사십 대의 영언니를 보며 사람들은 무어라 생각할까. 사이좋은 자매라고 생각할까?
어린 시절 이후로, 친구의 손을 잡고 걸어보는 일은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언니와 손을 잡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언니도 한 20년 전, 대학시절에 친구와 손 잡고 걸어본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내 주변 친구들을 떠올려봤다. 누구와도 손을 잡는 상상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색하다. 어른들끼리 손을 잡다니,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런데 언니와는 정말로 어색하지가 않다. 언니와 손을 잡고 걷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5살의 나를 기억하는 언니. 그래서 언니는 나를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금도 그때처럼 귀여워." 물론 언니 말에 따르면 25살의 정연은 '아기처럼' 귀여웠다고 한다. 지금은 아기에서 대폭 노쇠해졌지만, 누군가가 나를 귀여운 대상으로 봐준다는 것이 너무도 기분 좋은 오후.
25살의 나는 갑작스러운 병마 앞에 조금은 날카롭기도 했을 테고, 가끔은 진상을 부리기도 했을 테다. 그러나 진상짓 같은 것은 결코 없었다는 언니의 포용을 그대로 믿어버리기로 한다.
가장 힘들었던 지난해 봄, 벚꽃이 핀 카페의 뒷마당에 앉아 우리는 첫 데이트를 했다. 처음으로 사복을 입고 만난 우리. 봄바람이 유난했던 그 오후. 가슴에 맺힌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많이 힘들었던 그 순간의 이야기를, 언니에게는 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도시의 구름다리를 건넜었다. 언니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계속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이후, 우리는 단둘이 만나기도 하고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우리는 참 결이 비슷하구나 느끼곤 한다.
내가 10년간 보아온 언니는, 정말로 차분하고 조용한데 웃음이 무척 많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따스한 사람이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것치고는 니들링을 하거나 지혈을 하는 그 시간 동안 나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고. 어쩌면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서로의 맨얼굴을 많이 보았는지도 모른다.
이번 만남에도, 참으로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는 할 수 없을, 그런 이야기들을 한참 나누었다. 그리고 오티브 잡스, 인주 할머니와 같은 지나간 친구들의 이야기도... 여전히 병원에 다니고 있는, 내가 아는 얼굴들의 근황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고, 이대로면 해가 져 버릴 것만 같아서 일어난 참에 언니가 말한다. "우리 진짜 자주 만나면 좋겠다." 조만간 또 만나자고 언니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우리는 걸어왔던 길을, 다시 다정하게 손을 마주 잡고 걸었다. 언니는 또 버스정류장에서 내가 탈 버스를 함께 기다려주었다. 언니가 바로 돌아서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아주 빠르게 인도 쪽으로 늘어선 뒤쪽 좌석에 앉았다. 언니는 또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보며 손을 흔든다. 나도 언니가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 손을 힘차게 흔들어본다.
타고나길 마음이 섬세하고 예민해서, 사람 사이의 일이 제일 어렵다. 특히나 먼저 연락하는 것을 싫어하고, 인연이 이어지는 일에 대해서 자주 회의감을 느낀다. 관계가 버거워서 더는 관계가 확장되지 않기를 바라며 살아가기도 하고, 능숙하게 관계를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나만 그럴까. 세상 모두는 완벽하기만 할까. 모두들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또 미숙하다고 여기며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나도 나에게 좀 너그러워져야지 하는 마음이 나의 어깨를 토닥인다.
무엇보다 10년을 매일같이 만났음에도, 여전히 나를 보고 싶어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내가 그리 나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만 같다.
혼자 살아가는 삶 속에서는 결코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것. 영언니를 통해 보는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 타인에게 진심과 정성을 베풀 줄 아는 사람. 영언니는 늘 말한다. "정연이는 나를 귀하게 대해준다는 느낌이 들어." 그래,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이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인 것이다. 100명의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오늘도 딸에게 화를 버럭 냈는데. 반성을 하며, 정연엄마가 되어 설거지를 하러 간다. 엄마는 퇴근이 없다.
어쨌든, 곁에 나를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를 조금 더 좋아할 것. 그것이 오늘 당신과 나의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