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비교적 담대한 성격이 되었지만, 건강했던 24세까지의 이정연은 매일 밤 이불을 발로 차던 사람이었다. 늘 잠자리에서 오늘의 실수를 곱씹으며, 이불을 발로 차며 몸부림쳤다.
아프고 나서는 그런 성질을 좀 내려놓을 줄 알았다. 게다가 아픈 이후의 인간관계란 고작 병원에서의 다섯 시간이 전부였으니 이제 더는 몸부림칠 일이 없겠거니 했다. 그러나 오늘 병원에서 어떤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던가 곱씹고,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몸으로 '으아아아아아악'을 외치는 이정연이었다.
그런 이정연에게 참으로 안 좋은 말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이야기하다가 상대방의 말을 막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남에게 여러 번 야단을 맞고 대구 할매와 수도 없이 통화를 하던 어느 날 그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할매와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살았었다. 모종의 이유가 있다. 아주 타당한 이유. 그러다 병에 걸리고 한 몇 년쯤 지나니, 할매가 무척 그리워졌다. 희귀 난치병 환자가 되고 나니, 사실 많은 사람과 많은 것들이 그리워지더란 말이지.
그렇게 할매를 다시 만난 것이 28살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할매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엉엉 울며 나를 끌어안았다. 물론 현실은 흰 양말이었지만.
그렇게 할매와 해후를 한 이후, 난 할매에게 자주 안부 전화를 드리곤 했다. 별일이 없어도 수시로 전화를 했다. 할매 진지는 잡쉈는지, 집은 따스운지 몸 어디 안 좋은 곳은 없으신지.
할매는 참으로 내가 전화하는 걸 좋아하셨다. 우리 사이에는 늘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반가운 마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가끔은 내가 무슨 말을 못 할 정도로 할매가 말을 막을 때도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급해서인 것을 안다. 그래서 할매가 말을 막아도 밉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내 말을 막는 할매의 모습을 보고서 거울 치료가 됐다. '아이고마, 나도 말하다가 할매처럼 저러는 거 같은데? 이거 말 막는 유전자를 할매한테서 받았는갑다.'
아니나 다를까, 정남이와 이야기할 때 내가 그렇게 말을 막는단다. 예전부터 '누나는 말 좀 막지 마라.'라고 정남이 화를 버럭 내는 일이 가끔 있었다. 할매를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데다가, 정남이에게도 야단을 맞았으니 남의 말 막는 그 더러운 버릇을 고쳤는가 했다.
정남이와는 주말 출근 때에 단둘이 차를 탈 일이 많다. 그럴 때 정남이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내가 그에 맞장구치는 듯하다가 연관된 다른 이야기를 이어서 하는 일이 몇 번 생기자 정남이는 아주 강하게 화를 내었다.
그 후로 정말로 나는 입을 꾹 다문다. 요즘은 고개만 끄덕이거나 오오 정도의 소리로만 공감의 표시를 한다.
옛 말에 팔자 도망은 못 한다, 하였으나 나는 할매로부터 받은 유전자로부터 도망친다. 스스로 유전자 개조를 해내고 말 것이다. 아주 굳은 마음을 몇 번이나 먹었다. 이제는 어떤 대화에서도 말을 막는 법이 없다. 혹여 실수로라도 상대방의 말을 막을 뻔하면, 바로 내 말을 접고 '먼저 말씀하시라'하고 바로 그이의 말을 듣는 일에 집중한다.
오늘도 우리 무인카페에 로봇을 돌보러 출근하는 길, 정남은 신이 나서 내게 이야기를 한다. 정남의 취미 중 하나가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게임을 하는 것인데, 요즘 좋아하는 게임을 새로 사서 연휴 내내 게임을 하고 있다. 그 게임 이야기를 하느라 신이 난 정남. 나는 가만히 정남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 아니면 어디 가서 정남이가 이런 이야기를 신나게 하겠나 싶은 마음도 있고, 말 막는 인간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기 위해 귀는 활짝 열고 고개는 리드미컬하게 까딱까딱.
듣는 티는 팍팍 내되, 얌전하게 20분 내내 정남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정남이는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한다고 나를 따라 카페로 들어왔다.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를 정돈해 주며 이야기를 마치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언젠가는 할매에게서 받은 '말을 막는 유전자'를 완전히 극복하고, 차분하게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따스한 사람으로 우뚝 설 날이 오리라. 일단은 정남에게서 '잘 들어주는 누나'라는 멋진 타이틀을 획득하겠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일도 한결 수월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