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과는 매일 빠지지 않고 통화를 한다. 그는 내 목소리만 들으면 몸이든 마음이든 불편한 것을 대번에 알고, 하루의 일도 대강 파악해 버린다.
그녀를 만났던 날, 그가 듣기에 나의 목소리는 무척 기분이 좋은 사람의 그것이었나 보다.
처음부터 그녀는 참 티가 많이 났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도 건방져 보이려나?
왠지 모르게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무척이나 투명하게 보였던 그녀는 때때로 나와 한강 걷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라고 답했지만, 늘 망설여졌다.
나의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새로운 사람을 인생에 들여놓으면, 기존에 있던 누군가에게 쏟을 마음이 부족해질까 봐 관계 확장시키기를 늘 두려워한다.
대단한 인간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쓰는 일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 100명의 사람에게 대충 몇 줄의 안부를 물으며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수에게 연락을 줄기차게 하는 편도 아니지만, 되도록이면 소수에게 진한 마음을 주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마음에 없는 행동이나 마음에 없는 소리는 잘하지 못한다.
참 재미있는 것이, 늘 어떤 이유로든 내 주변은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른다.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곁에 있던 누군가가 내게 실수를 하든 나를 미워하든 나의 바운더리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다.
이정연만의 '관계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징크스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변에 새로이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불안하다. 관계의 지각변동이 있을까 봐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두렵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고, 때로는 그 적정함에 대해 계산하는 것이 귀찮고 힘들다.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나는, 때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그리고 몇 번의 관계에서 나 스스로를 '100미터 미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유명 정치인이었던 그는 한때 우리 옆 동네를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이었다. 지금은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청바지에 쟈켓을 입고 국회에 나타난, 감색 양복맨들 사이에서 격식을 타파한 그의 차림새가 연일 화제가 되던 때가 있었다. 대중들은 그를 칭찬했지만, 그의 지역구 주민들은 지역구 일에는 관심도 없고 인기 얻기에만 혈안이 된 기회주의자라며 그를 헐뜯었다. 그를 두고 100미터 미남이라고들 말이 많았다. 그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다만 나 또한 그런 사람일까 봐 걱정이 일어날 때마다 정치인이었던 그의 생각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랜선으로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글 속에 있는 이정연은 무척 괜찮은데 실제로 가까이 본 이정연은 그렇지 않을 수가 있어서 말이지. 몇 번의 관계에서 그런 일을 당했었다. 괜히 관계를 랜선에서 현실로 이어갔다가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는 멀리서 봐야만 괜찮은 사람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랜선으로는 그토록 나를 존중하고 나를 좋아했던 친구가, 실제로 만나서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고 결국 관계가 박살이 나는 경험들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브런치를 통해서만 교류를 했었기에 그녀는 나를 무척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괜히 만나서 그녀의 환상을 깨 버리고 싶지 않다, 랜선으로만 유지되는 지금의 거리를 지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참 했다. 그녀는 외향형, 나는 내향형. 그런 성향의 차이도 겁이 났다. 나는 낯도 많이 가린다.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다. 그래서 만남이 성사되기까지의 인과관계는 설명할 수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봄바람이 일렁이기 시작하는 4월 초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꽤나 긴장한 채로 선유도역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전철을 놓쳐서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너무 걱정을 하길래, 환승하는 전철역에서 일부러 기웃거리며 작은 꽃도 한 다발 샀다. 나의 도착시간을 늦춰서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꼼수였다.
선유도 역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길을 걷는 중에도, 밥을 먹는 동안도 그녀는 끊임없이 웃었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외향형, 나는 내향형인데 걱정과 달리 내향형인 내가 말이 더 많았다.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그녀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폭소를 해주니. 이건 뭐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말하면 믿지 않겠지만, 한때는 00 여고 유재석이었다.
나와 시선이 맞는 그녀와는 걷기가 참 좋았다. 우리는 눈을 맞추며 봄날의 거리를 걸었다. 선유도 역에서 한강공원으로 걷는 도중, 올해 첫 벚꽃을 보았다. 이북에 가까운 우리 동네는 그녀를 만나던 주의 이전 금요일에도 영하의 날씨를 기록했다. 이제 막 목련이 피어날까 말까 나와 밀당을 하던 중에 흐드러지게 핀 서울의 벚꽃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데, 그녀는 웃으며 나를 한참이나 기다려주었다. 우리 딸에게서는 볼 수 없는 배려. 우리 딸은 함께 걷다가 내가 사진을 찍어대면, 그대로 두고 자신의 길을 간다. 그래서 난 혼자 한참 셔터를 눌러대다가 뛰어서 딸을 쫓아가곤 하는데, 그녀는 너무도 다정하게 나를 기다려주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 수도권에 살았지만, 한 번도 한강공원에 가본 적이 없다. 세상 모두가 놀랄 만큼 경험치가 부족하다. 아직도 처음인 것, 새로운 것들이 정말 많다. 그런 나를 깔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처음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다. 그녀 덕분에 첫 한강공원에 왔고, 한강공원 어드매의 나무 계단에 앉아 '작은 팬 사인회'를 했다. 그녀가 친구들에게도 선물하려고 내 책을 몇 권 샀다. 그 작은 몸으로 그 책을 무겁게 지고 온 것이 미안했다. 옆에서 영감님들은 장수막걸리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품격 있게 팬 사인회를 했다. 왠지 한강변을 걷는 이들이 모두 우리의 사인회를 주목하는 것만 같았다.
'맞아요, 여러분! 제가 바로 병팔이 아이돌 이정연이랍니다. 곧 슈퍼스타가 될지도! 지금 봐 두라구욧.'
우리는 적절히 걷고, 한강 선상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 이야기를 그녀에게서 들었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역시나 그녀는 자꾸 웃었다. 내 이야기에 이렇게 많이 웃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정남이는 정말 내 말에 잘 웃어주지 않는다. 한때는 세상 모두가 부러워할 절친이었는데, 요즘은 안 웃긴다며 콧구멍 벌름거리고 타박을 해댄다.
그녀에게는 나의 모든 말이 통한다. 주위에 출간한 친구들이 많아서, 내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도 많이 해주어 감사한 마음으로 들었다. 그러나 대부분 내향형인 내가 떠들고, 그녀는 듣는 입장이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좋아서 떠들어댈 맛이 났다.
그녀는 굳이 나와 같이 경의선을 타고 가다가 환승을 하겠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라는 말에, 공유에게 고백을 받은 듯 설레고 말았다. 그리고 함께 경의선을 기다리다가 소녀처럼 웃다가 잠깐 눈물을 보였고, 나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감정 표현이 투명한 그녀가 부담스럽지 않고 좋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정연씨 말투가 꼭 김수현 같아요. 눈물의 여왕 보나요? 거기에 나오는 김수현 캐릭터랑 말투가 똑같아요." 나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서 김수현의 말투가 어떤지 모르지만, 일단 내가 김수현을 좋아하고 또 굉장히 호감형인 남자 배우이니까 분명 칭찬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저런 환한 표정으로 욕을 하는 사람은 이 우주에 없지 않을까? 그녀의 표정은 참으로 작은 봄꽃 같았다.
김수현의 말투가 정말로 궁금했다. 그래서 차근차근 '눈물의 여왕'을 1화부터 다 보았다. 무리는 하지 않았지만, 정말 재미있어서 살짝 몰아치기하듯 본 날도 있다. 주말에는 바빠서 드라마를 챙겨보지 못하니까, 집안일을 싹 다 해두고 눈물의 여왕 11화를 틀어놓고 이 글을 마무리한다. 사실 아무리 들어도 김수현 말투의 어디가 나와 비슷한지는 완전하게 파악이 되지 않았다. 차분하고 진지함 맥스로 말하는 것? 백현우-김수현의 캐릭터-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말하는지는 열심히 들어서 알겠지만, 당사자이기 때문인지 나의 말투와 그의 말투를 비교하기에는 객관성이 떨어진다.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한가. 어쨌든 멋진 백현우 말투 같다는데, 김수현 같다는데. 그냥 좋다. 그거면 된다.
벌써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보름이 지났다. 아직도 함께 보았던 올해의 첫 벚꽃이 생각나고, 함께 바라보았던 한강공원의 연둣빛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녀를 떠올리면 그녀의 봄꽃같이 환한 미소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침을 겪었다. 우중충하게 흐린 날이 많고, 여전히 힘든 일들이 많다. 타인에게 굳이 털어놓고 싶지 않은 그런 힘든 일들은 언제나 있다. 그럼에도 한 번씩 그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고, 다음에는 어디를 함께 걷게 될지 기대가 된다. 글을 쓰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글이라는 매개 하나만으로 이 나이에도 좋은 사람을 새 친구로 삶에 들여놓을 수 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이런 설레는 일은 인생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