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공휴일. 쉬는 평일이 되면 정남은 당연한 듯이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또 데리러 온다.
"병원 끝나고 오는 길에 둘이 점심 먹을까?" 하는 나의 말에, 정남은 글쎄라고 하더니 카톡으로 어느 식당 링크를 보낸다. '난 여기 가서 무조건 칼비빔면 먹을 거임. 장소 변경은 없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칼국수 맛집인가 보다. 신기한 정남. 나는 어디서 맛집 정보 같은 것을 주워듣는 일이 아예 없다시피 하는데, 정남은 이런 정보를 잘도 얻어 듣고 다닌다.
정남과는 병원 앞에서 12시 10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정남이가 기다릴까 봐 그런지, 오늘따라 지혈도 무척 빠르게 되었다. 정남은 약속 시간보다 빠르게 병원 건물 옆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
늘 병원에 갈 때는 공복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더욱 배가 고프다.
돈가스 집과 붙어 있는 국숫집이다. 주차장은 만석. 독일 명품차 옆 빈 공간에 주차를 하려다 아슬아슬하게 밀착될 뻔하여 내가 소리를 빽 질렀다. "차 빼, 얼른 빼. 이건 아녀, 총각." 사실 이때 벌써 후회했다. 나는 맛집을 싫어한다. 보장된 맛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붐비는 상황에서 발생되는 여러 문제를 싫어하고 오로지 맛을 위해 오래 줄을 서는 원초적이고 비합리적인 자세를 지양하는 것이다. 주차부터 문제가 생기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정남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하니 말초신경에도 문제가 생겨 아주 강력하게 발이 뒤틀렸었다. 그러다 누군가 나가는 바람에 정남은 그 자리에 조심히 주차를 했다.
사람이 많아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려나 걱정을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좋은 좌석에 자리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수저와 물, 앞접시를 챙겨준 정남은 대번에 항아리에서 김치를 덜어서 내게 권한다.
"누나, 여기가 유명한 김치 맛집이란다. 얼른 먹어봐."
정남은 고집이 있다. 절대적으로 엄마의 김치만을 고집하여, 우리 집은 김장을 하지 않는 때가 없다. 그런데 이 집의 김치가 엄마의 김치와 맛이 너무도 똑같아, 놀란 정남과 나는 국수가 나오기도 전에 김치를 흡입했다. 이제 막 담가 고춧가루 풀내가 솔솔 나는 김치. 항상 집 냉동실에는 엄마의 김치 양념이 한통씩 들어있는데, 지금 그 양념을 꺼내어 쭉쭉 찢은 절인 배추에 버무리면 딱 이 맛이 날 것이다.
만두 한 판, 바지락 칼국수 하나와 칼비빔면 하나를 주문했다.
파전을 하나 시키고, 만두 반 판을 주문하려다가 말았다. 파전은 다음에 엄마와 함께 와서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정남의 말에 고개를 끄덕했다. 아차, 엄마는 지난 금요일에 이미 투표를 하였고 투표일인 오늘 출근했다.
먹는 일에 있어서 모험이란 없다. 나는 취향이 일관된 편이고, 입성이 까다로우며 맛없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절대 모험을 하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평범하게 바지락 칼국수를 주문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만두 한 판이 일곱 알이다. 국물 때문에 처음에 양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던 바지락 칼국수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만두 한 판 주문한 것을 이내 후회했다. 바지락 살을 모두 발라낸 후 먹겠다는 결심을 한 후 아무리 바지락 껍데기를 잡아내도 끊임없이 바지락이 있었다. 바지락만 작게 한 포대를 넣어 끓이신 것 같다. 게다가 해감을 정말 잘해서 그 어떤 바지락에서도 모래는 씹히지 않았다. 어딜 가나 모래를 씹는 인생을 살아온 이정연은 모래가 씹히지 않아서 충격을 받았다. 국물이 구수하고 깊었다.
사실 만두는 크기는 크고 푸짐했으나 두부의 비율이 너무 높아서 사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물론 두부의 압도적 비율에서 직접 빚었다는 태가 나서 확실히 공산품에 비해 고소하고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났다.
나의 바지락 칼국수가 나오고, 이내 정남이가 주문한 칼비빔면이 나왔는데 나오는 모습을 본 순간 홀렸다. 일단 비비기 전의 모습이 매우 푸짐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고소한 향기가 솔솔 났다. 칼비빔면 그릇이 나오자마자 '아차, 주문을 잘못했구나!' 생각했지만 절대 집적거리는 표는 내지 않았다. 정말이다.
그럼에도 정남이는 칼비빔면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누나가 안쓰러웠는지, 야무지게 비비더니 앞접시에 예쁘게 덜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바지락 칼국수를 듬뿍 덜어서 정남에게 주었다. 국물이 매우 시원하다며 엄지를 흔들어가며 영업했다.
정남이의 칼비빔면은 삶은 닭고기 살을 잘게 찢어 넣었고, 상추와 채소들이 곱게 채 쳐져 들어가 있다. 칼국수 면을 대체 왜 고추장 소스에 비벼 먹느냐고, 저게 대체 무슨 맛이겠냐며 티브이에 나오는 칼비빔면들을 폄하했던 지난날의 이정연은 고개를 숙였다.
칼비빔면이 식탁에 도착하던 순간부터 고소한 향기가 났고, 역시 비벼진 칼비빔면을 젓가락으로 집자마자 아주 고소한 참깨와 참기름의 향이 아주 적절히 났다. 과한 참기름에는 경기를 일으킨다. 그러니 이 칼비빔면 속의 참깨와 참기름에 내가 사로잡혔다는 것은, 아주 절묘하게 양이 가미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참기름간장밥에도 참기름 한 숟갈을 절대 넣지 않는 사람인데, 칼비빔면은 고소한 향기만 맡고도 무릎을 꿇었다. 그 향에 취한 채 호로록 면발을 흡입하는 순간, 분명 삶아서 얼음물에 입수시켜서 헹궜음직한 탱글함이 느껴졌다. 전분기를 싹 빨아낸 탱글한 면발임에도 고추장소스는 아주 쏙 베어든 것이 너무 맛있어서 '으으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먹었다. 내가 너무도 맛있게 칼비빔면을 호로록 빨아들이니, 정남은 "누나, 칼비빔 한 그릇 시켜줄까?"라고 물었다.
사실 바지락 칼국수도 무척 맛있는 데다, 양이 많아서 감당이 안될 것 같은데 한 그릇 더 시켜준다는 정남이의 호의는 과했다. 그런 정남이를 말리며, 얼른 내 국수나 더 먹으라고 덜어주었더니 세상에 군말 없이 다 먹어주는 정남. 역시, 난 잘 먹는 남자가 좋더라. 남은 만두를 꾸역꾸역 다 먹으려 하기에, 정남이를 말렸다. 왕만두 세 개는 정남이 위장에, 한 개는 정연이 위장에, 나머지 세 개는 포장했다.
직원분들도 모두 환하게 웃으시고, 매장도 깔끔하고 음식도 정말 맛있고. 빨리 칼비빔면 먹으러 다시 와야지 주먹을 불끈 쥐는 이정연이었다. 그리고 오늘 점심은 누나가 사겠다며 카드를 꺼냈는데, 정남의 표정은 단호하다. 카드 넣어라. 정남이는 한번 아니면 아닌 사람이라, 이럴 때 덤비면 안 된다.
식사를 마치고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정남이와 계속 맛있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 정말 돈이 하나도 안 아깝다."
"당연하지. 누나 돈 아니니까."
아, 그러네하고 긁적이는 나를 보며 정남이가 막 웃더니, 요즘처럼 고물가 시대에 어딜 가나 한 끼 식사가 만원은 하지 않느냐. 그럼에도 이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은 나도 처음이다, 하며 극찬을 했다. 조만간 꼭 엄마와 셋이 오자고 말하는 정남에게서 따스한 정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남에게 우기고 우겨서, 아이스크림이 한 덩어리 뜬 커피를 대접했다.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 늘 차도 얻어 타는데 커피라도 꼭 사고 싶었다. 정남은 못 이기는 척 카페 앞에 주차를 했다. 우리는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투표장으로 향했다.
마음이 힘든 시기였다. 그럴 때 나를 어디든 싣고 다니는 정남이의 존재가 있어 든든한 마음이 생기고, 함께 먹은 국수가 맛있어서 또 시름이 잊혔다. 그리고 그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맛이 상상되지 않는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음식이든, 그 무엇이든 인생에는 모험이 필요하다. 의외로 나의 취향에 맞는 새로운 보물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는 작은 모험 정도는 시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