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지가 내게로 왔다.

by 이정연



가지를 먹지 않는다. 가지를 먹은 기억이랄 것도 없다. 어린이 시절 가지를 한입 베어 물었다가 퉤 하고 뱉은 일만이 선명하다. 가지의 그 물컹한 식감. 나는 단칼에 가지를 거절했다. 후 다시는 가지를 먹지 않았다.

나는 물컹한 식감이 싫어서 리도 먹지 않았는데, 결국 젤리를 먹지 않는 독특한 어린이에서 젤리를 먹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났다.

나만의 뚜렷한 기준이 있다. 씹다가 비위가 상하면, 또 먹지 않는다. 까탈스러운 입맛이다.


인생은 짧고, 끼니는 한정적이다. 그러니 굳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으로 끼니를 낭비할 필요 없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삶이 어디까지 이어져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 내가 그녀를 또 만나길 원한 것은, 나로서도 기쁜 일이다. 시간을 내고 싶은 사람이 인생에 늘어가는 일은 생의 작은 행복이다.

연둣빛 봄이 활짝 열렸던 4월의 초 그녀와 한강 공원 산책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우리 동네로 와서 나와 함께 걷겠다고 한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호수공원을 함께 산책하자고 이야기했다.

여름이 될수록 컨디션이 떨어지는데, 넘치는 에너지로 나의 도시까지 기꺼이 오겠다는 그녀의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한 의류매장 앞을 지키고 있던 포메라니안 친구. 스핑크스인 줄 알았다.

이 동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은 카페로 그녀를 모셨다. 매장의 크기는 작지만, 백발의 멋진 아버지가 직접 로스팅을 하신다. 사장님은 따님. 따님이 출산하는 동안에 로스팅을 담당하는 아버지가 나와 계실 때 들렀던 적이 있어서 안다.

멀리서 친구들이 찾아오거나 할 때 꼭 이곳으로 간다. 커피 맛도 좋고 이야기하기에도 좋은 공간이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호수공원을 향해 걷기로 했다. 청계천처럼 조성된 소리천을 따라 걸었다. 재잘재잘 소녀들처럼 이야기를 나누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호수공원으로 연결되는 길을 만났다. 막 실개천 공원을 조성한다고 땅을 파헤쳐 두었을 때만 보았는데, 제법 멋진 천변 길이 되었다. 친구가 소리천을 따라 걷자고 먼저 제안해 준 덕분에, 소리천과 호수공원이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 가장 좋아하던 개망초 꽃을 만났다. 소리천과 호수공원이 연결되는 오솔길에서였다. 개망초 꽃에 탄성을 지르며, 우리는 호수공원으로 접어들었다. 분명 친구를 만나러 나오던 때는 살짝 쌀쌀한 느낌이었는데, 어느새 덥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 근처가 아니라서 자주 오는 곳은 아닌데 오랜만에 와 보니 공원 정비가 더욱 잘 되어 있었다. 올 때마다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은 '사랑의 그네의자'가 비어있어 친구와 앉아서 발을 굴렀다. 하트 모양으로 깎은 프레임 속에 그네가 매달려 있서, 비어 있는 적이 없는데 운이 좋다.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간질이고, 그늘이 진 장소여서 그네의자를 즐기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앞에 보이는 붉은 양귀비 밭과 시원하게 펼쳐진 초록, 그리고 맑은 하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좋았다.


친구와 나. 그네를 타면서 발 샷을 한 장 남겨보았다. 좋은 것들이 한데 담긴 귀한 사진.


친구를 만나 함께 오래, 즐겁게 걸으며 좋은 것들을 많이 만났다. 이 날은 정말 기분 좋은 바람과 제대로 된 봄을 담뿍 맞았다. 호수공원에는 전에도 몇 차례 온 적이 있지만 가장 예쁘고 좋은 풍경들을 본 날이다.


점심시간을 지나 만나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한참을 걷고 또 벤치에 머무르며 이야기하다 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친구와 호수공원을 둘러 돌아 나가는데, 다시 또 걷고 싶은 공원이라고 친구가 이야기해 주어 기뻤다. 호수공원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건넜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맛있을 법한 식당을 알고 있어서 그리로 걸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영업종료' 안내문을 보고 무척 당황. 이거 어쩌나, 하며 몇 걸음 더 걷다가 우연히 솥밥집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즉흥적으로 솥밥집에 들어갔다.


친구는 하이볼의 좋아하는 창창한 청춘이다.
나는 콜라, 친구는 하이볼. 나는 건배를 좋아한다.


정갈한 한 상이 나왔다. 친구는 가지솥밥을 주문했고, 나는 매콤 소고기 숙주 솥밥을 주문했다. 친구가 내게 물었다. "정연은 가지 안 먹어요?"

나는 평생 가지를 먹지 않고 살아온 삶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했고, 친구는 맛있는 가지를 먹지 않는 나를 담백하고도 짧게 안타까워했다. 나에게 자신의 가지 솥밥을 권하기에, 나답지 않게 기분 좋게 응했다.


그녀는 내가 가지를 싫어한다고 하니, 솥밥 위에 얹어진 가지 중에서 작은 조각을 골라서 주려고 애를 썼다.

음식을 먹는 데에 있어서 무척 보수적인 내가, 친구의 가지를 왕 베어문 순간 깜짝 놀랐다.



내가 나이가 들었나 보다. 나이가 들면 입맛도 변한다던데, 세상에나 가지가 맛있었다!

양념이 적절하게 벤 가지는 촉촉하고 살짝 쫄깃한 듯 몰캉거렸다. 내가 맛있게 가지 먹는 것을 보더니, 친구가 한 조각을 더 주었다. 친구 덕분에 가지의 맛을 아는 어른이 되었다.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하게 하는 사람, 평소 먹지 않던 음식을 먹게 하는 사람. 나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대체로 실패로 돌아간다. 정말로 나의 입맛은 보수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타인을 위해 하지 않던 일을 잘하지 않기도 한다. 굳이 그러지 않는다.


그런데 친구는, 창창 그녀는 정말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와 나는 나이차이가 꽤나 나는데도, 나는 또래의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그녀를 만나는 것이 더욱 편안하고 재미있다.

그녀는 '내가 연장자니까 내 말이 옳아'라는 꼰대스러운 태도를 취할 줄 모른다. 그저 정연은 정연, 창창은 창창. 우리는 우리 다운 모습 그대로 서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많은 순간 나를 배려한다. 그래서 평소 먹지 않는 가지를 건네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기꺼이' 가지를 씹을 수 있었다. 물렁한 식감이 아닌, 몰캉한 식감으로 느끼게 한 것은 내가 나이를 먹은 탓도 있겠지만 창창과 함께한 식사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여유로운 일요일 오후, 창창과 가지를 생각한다.

가지로 어떤 요리를 한 번 해 먹어볼까. 앞으로 나는 또 어떤 새로운 일을 그녀와 함께 하고, 어떤 새로운 감정을 그녀와 나누게 될까.


가지가 내게로 왔다.

3x 년 간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일, 가지가 내게로 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