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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K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by 이정연



애석하게도 자유시간이 화요일, 목요일뿐이다 보니 사실 약속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대학병원 외래가 있으면 '나가리'지요.

지난 목요일에 K 교수님을 뵈러 간다 말씀드렸었죠? 그러나 조금 늦잠을 잤고, 그 김에 더 잤습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한 화, 목이 없어서 잠에 욕심이 났습니다.

깨어나니 중재실 간호사 선생님의 메시지가 와 있더라고요. 목요일에는 교수님이 오후 진료를 안 하시니 알아두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다음 화요일로 방문을 미루었습니다. 일어났을 때 이미 오전 1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거든요.


그리고 주말을 지나 약속의 화요일이 되었습니다.

네, 바로 오늘이에요. 편도 2시간 거리라서 쉽게 엄두가 나지는 않지만 목요일에 가려다 못 가니까 꼭 빚을 끌어다 쓴 것 같더라고요.

정말 일찍 일어나 교수님 출근 시간에 맞추어 가려다 말았습니다. 오늘만큼은 새벽에 나가기 싫어서, 7시 반쯤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아침으로 레드루비 키위 하나 먹고 우유 마시고 세수하니 8시가 넘었네요. 하도 화장을 안 하다 보니 피부도 배가 고팠는가 봐요. 장을 잘 먹었네요. 집 앞에서 버스 타고, 9시가 채 되지 않아 역에 도착했습니다. 방배역으로 출발합니다.


방배역은 낯설어요. 교수님은 이미 개원하신 지 2년 가까이 되어서 달리 사갈 것이 마땅찮아요.

혼자 고민을 하다가, 정남이에게도 카톡으로 상의를 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번뜩인 것이 마카롱. 맛도 있고 성의 있는 선물처럼 보이잖아요? 역 근처 카페에서 마카롱을 사 가기로 마음먹고 길을 건넙니다.

카페에서 마카롱 포장을 기다리는 동안, 선물드릴 책을 한번 펼쳐봅니다. 제 사인 어때요? 사인은 슈퍼스타 같지요? 헤헤헤.

마카롱 두 상자를 샀습니다. 한 상자는 외래 선생님들 드시라고 샀고요, 나머지 한 상자는 교수님 드릴 것이라 가방에 챙겨 왔던 책을 마카롱 쇼핑백에 담았습니다.

룰루랄라. 가슴이 떨립니다.

혹시 방배 쪽 사시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 교수님네 병원 추천합니다.


제가 5층 엘리베이터에서 딱 내려서 두리번거리니, 외래 선생님이 어떻게 오셨냐며 말씀하시기에 자동문 버튼을 누른 순간이었습니다. K 교수님이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셨습니다. 와, 운명 같았어요. 그리고는 잠깐 너 누구냐는 듯 낯선 눈빛으로 장난을 치시더니, 이내 "이정연~"하고 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정하게 어깨를 톡 하시더니, "잠깐 여기 앉아있어~"하고 인공신장실로 건너가셨습니다.


외래 선생님께 마카롱 한 상자를 드리고, 교수님을 기다립니다. 가방을 벗고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사실 교수님과는 독대한 적이 없어요. 10년 간 늘 시술실에서만 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아까 진짜 저를 못 알아보셨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전 늘 시술대에 누워있었거든요. 교수님을 만났던 대부분의 순간 누워있었네요. 서 있는 저를 엄청 낯설게 느끼셨을 거 같다는 생각을 뒤늦게 해 봅니다.


다시 돌아온 교수님을 따라 진료실로 들어갑니다. 퇴직하시고 2년, 얼굴이 더 좋아지셨어요. 젊어지셨네요. 안 그래도 잘 생기셨는데 회춘까지 하시다닛.

교수님 책상에 <서른 살> 책을 꺼내어 놓고, 마카롱 봉투를 얹어두었습니다. 교수님이 계속 책을 만지작 거리시고, 촤르륵 책장을 넘겨 보십니다.

"언제 이렇게 책을 다 썼어? 멋지다. 대단하다, 야."

"글은 오래전부터 쓰다가, 망설이던 투고를 작년에 했는데 운이 좋게 금방 출판사랑 계약이 됐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220페이지에 교수님이 주인공이신 에피소드 나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허허 웃으시며 220페이지를 찾으십니다. 교수님이 책에 나오시기 때문에, 안 그래도 책 갖다 드리고 싶었는데 불러주셔서 너무 기뻤다고도 말씀드립니다.


교수님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혈관 좀 봐줄게, 하십니다. 입고 있던 청재킷을 벗고 왼팔 소매를 확 걷었습니다. 동글이(투석 혈관에 있는 피주머니의 애칭) 얼굴이 쏙 나왔습니다.

"교수님, 동글이가 좀 작아졌죠? 히히히."

교수님은 동글이를 꾸우우우우욱 눌러보시고, 혈관의 소리를 손 끝으로 들으십니다. 그리고는 외과 수술로 동글이 크기를 좀 줄이는 것이 낫겠다며 걱정을 하십니다. 사실 외과 교수님께 갔더니, 어차피 이식할 거니까 내버려 두라고 하셨었거든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그러시네요. "외과 애들이 이거 어려우니까 안 하려는 거야. 내가 하라고 하면 하지." 교수님은 퇴직하셨지만, 여전히 우리 대학병원의 교수님이시거든요. 명예교수님이요.


"이전에는 시술 언제 받았니?"

"마지막으로 했던 게 1월 29일이요."

"그럼 얼추 세 달 돼 가니까 또 곧 해야겠네. 그래서 혈관 압력이 이렇게 높구나."

그냥 손 끝으로만 혈관 소리를 들으셨는데도, 교수님은 혈관 압력 높은 걸 대번 아시네요. 실 어제 투석 때 정맥압이 높았었거든요. 하여간 우리 교수님, 제 혈관은 눈을 감고도 아신다니까요.


교수님은 "너 책 많이 팔면 부자 되겠다, 야."고 웃으십니다. 검지와 엄지를 살짝 닿을 듯 말 듯하게 올렸습니다. "인세가 적어요."

크흐흐흐. 그래도 책을 써서 교수님도 독대하고 이런 기쁨과 영광이 어디 있을까요. 계속 글을 쓰고 책을 쓰며 살 테니까 앞으로의 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혈관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하시며 저를 배웅해 주셨습니다. 사실 함께 한 시간은 길지가 않았어요. 그래도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책을 쓴 일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또 인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으니까요.


삶의 고난은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가 늘 재미난 이야기만 하니, 요즘 우리 병팔이 아이돌 정연에게는 힘든 일이 없는가 보다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힘든 일 하나 넘었다 싶으면 또 다른 일이 생기고, 출렁이는 파도처럼 고난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나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저는 또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꼭 깨물고 나아가는 거지요. 이 너머에 있을 좋은 일을 생각하면서요.




아침에 나올 때는 날이 무척 흐려서 노란 우산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강남에 선 정오에는 해가 반짝하네요. 리의 인생도 그러할거예요. 흐린 날이 있으면, 쨍하고 해가 뜨는 날도 올거예요.

카페에서 마카롱 포장 기다리며 우산을 두고 왔습니다. 교수님을 만나뵙고 다시 역으로 가는 길, 그제야 카페에 두고 온 우산이 생각났습니다. 가 제일 좋아하는 노란 우산인데.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지나버려서 포기할까 하다가 카페로 되돌아갔습니다. 제가 두고 온 자리에 그대로 노란 우산이 있네요. 휴우, 이산가족 상봉입니다. 우산을 챙겨서, 이제 저는 교보문고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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