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_평균 나이 45세 선배님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가는 길이였다. 유럽에서 도착하자마자, 겨우겨우 룸메이트들에게 기념품을 넘기고, 다시 몽땅몽땅 캐리어를 채워서 울산으로 향했다. 잠시 후면, 24시간 동안 발을 딛고 있던 공간에 프랑크푸르트, 두바이, 인천, 서울로도 모자라 울산까지 존재할 예정이었다. 이렇게까지 급하게 내려가야 하는가. 맘에 안 드는 일을 생각할 때마다 존재감을 알리는 왼쪽 미간근육이 움푹 패여 들어갔다. 그 상태로 창문을 노려보며, 이 상황에 대한 고찰을 잠시 했다.
지난 12월 대학원 모든 수업이 종강했다. 졸업요건에 맞춰 공연 제작워크숍 2회와 종합시험 3개, 영어시험까지 치르고 나니 학기 중에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하게 파고들면, 내가 조금 게으르고, 능력이 부족해서 두 개의 공연을 하는 동안 제대로 된 In-put을 못했다고 봐야 한다. 논문을 쓸 만큼 머리에 채워야 할 지식이 부족해, 뭘 써야 하는지 조차 답이 안 나왔다. 그래도 시키는 건 꼬박꼬박 하는 성실함을 지켜내고자 교수님이 말씀하신 관심분야 에세이를 한 번 써보기는 했지만, 정작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니 결국엔 원점이다.
나는 ‘석사’ 대신 석사‘수료생’이 되어 예술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더불어 재학 중에 건드리지도 못한 논문 또한 가슴 한구석을 옥죄이는 덩어리가 되어 자리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정통으로 맞아 앓고 있을 때였다. 2018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간 울산에서 예술 경제활동을 하라는 제안이 왔다. 지리적으로 서울과 멀어지긴 하지만, 울산은 내 두 번째 고향이다. 4년 만에 울산에 내려가서 일을 하게 된다면 서울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향수병이 저절로 치유될 것이다. 게다가 예술활동을 하면서 경제활동까지 할 수 있다니. 다만 내가 함께 일해야 하는 연출님의 불같은 성품이 내 미래를 조금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 2월부터 예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경우의 수가 생각보다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마음 편하게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다. 비록 약 한 달 뒤, 귀국과 동시에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 날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때의 내가 견뎌낼 것이다. 제안을 수락한 나는 선택에 대한 결과를 오롯하게 받아내느라 괜히 KTX 창문에 화풀이를 했다.
10개월간의 안정성을 보장받고 울산에 내려왔지만, 근무 조건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첫 출근 날에 알게 되었다. 지방선거 일정으로 3, 4, 5월에 예정된 공연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난 울산에서 일하게 된 기념으로 동아리 후배들의 공연도 함께하기로 했었다. 이미 다른 선배님들께 전화도 몇 통 받으며 큰 결정을 응원한다는 소리도 들었기 때문에, 한 달만 일하고 후배들과의 약속을 취소한 채 다시 서울로 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경제활동 없이 예술활동만 하며 부모님과 살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잘 가라며 배웅해주던 남자 친구 얼굴도 생각나고, 차마 쪽팔려서 이 사실에 마냥 슬퍼할 수는 없었다. 나는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일을 하고, 동아리 공연을 준비하다가 붕 뜨는 시간이 찾아오면 논문을 한 번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울산의 작업환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립 합창단, 무용단, 교향단은 있지만, 시립극단은 없었다. 도시 내,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없어 연극 꿈나무들은 외부로 나가 싹을 틔운다. 그 해결 방안으로 연출님은 언제부턴가 젊은 시절의 동료들을 한 두 명씩 울산에 데리고 오셨다. 이번에도 평균 나이 45세로 구성된 배우 선배님들은 대부분 연출님의 선후배 동료들이었다. 부족한 인력을 대체하고자 한 달간 울산에 모인 어벤저스라고 보면 된다. 공연이 끝나면 서울로 떠나가는 그들과 함께 작업을 하며, 홀로 울산에서 한 길을 가시는 연출님은 여전히 불 같으셨다. 게다가 그 답답함 때문인지 연습시간에 자꾸 사라지셨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내 역할은 연출님이 없을 때 연습을 진행하는 조연출임으로 그 공백을 다시 채우는 것은 내 몫이었다. 대본을 세줄쯤 읽다 보면 사라진 연출님의 빈자리를 볼 때면 나 또한 온몸이 긴장되며 괜히 화장실이 가고 싶어 졌다. 다행히, 어벤저스 군단은 탄탄한 내공이 있어 연출님이 없어도 빠른 시간 안에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프로들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연출님은 더 연습시간에 바깥공기를 쐬러 나가셨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약 300일 뒤에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이었지만, 그곳에선 막내였다. 그래서 많은 챙김을 받았고, 조금 더 편하게 실수도 할 수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아직까지 석사 수료생이 '애기'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제한된 무대, 시간, 여러 가지 한계에서 오는 창의성으로 만들어가는 연극은 긍정적인 마인드가 없이는 오래 할 수 없다. 결국엔 다 잘 될 거라는 생각이 있어야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덜하다. 울산에서의 작업은 지방 공연장의 환경적인 제약이 컸던 만큼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잘잘못을 따지기보단 해결책을 찾는 쪽으로 향했다. 심지어 공연이 끝난 후, 스트라이크까지도 평균 나이 45세 선배님들과 함께했다.
지방으로 내려온 어벤저스와 스트라이크에 필요한 인력 예산이 각각 어떻게 책정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벤저스는 꾸려졌고, 스트라이크 인력은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공연장의 무대를 나를 비롯해 다섯 명도 안 되는 인원이 정리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 달간의 연습기간을 경험하면서 못하는 일은 없다. 다만 시간과 힘이 더 들어갈 뿐이라는 긍정의 사고를 키워온 덕분에 나는 묵묵하게 소품을 정리했다. 여러 번 오가기 싫은 마음에 최대한 많은 소품을 꾸역꾸역 박스에 집어넣고 창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뒤풀이 장소로 가시던 어벤저스 선배님 한 분이 나와 마주쳤다. 아마도 미어터질 것 같은 소품 박스를 겨우 잡고 있는 내 손의 떨리는 힘줄, 흔들리는 눈 빛, 공기를 따라 퍼지는 깊은 한 숨, 애써 웃어내는 내 표정을 읽으셨던 것 같다. 창고에 갔다 돌아오니 완전체가 된 어벤저스가 극장을 원상복구 시키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덧 마루를 들고 옮기는 선배님들의 모습에 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스트라이크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만 보였다. 그 순간 우린 동료였다. ‘이십 년 전 학교 공연할 때 생각난다, 그땐 이걸 한 번에 몇 개씩 들었는데’ 그런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선배님들의 시간은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다. 이십 년이 지나도 빨간 목장갑 없이 못 박힌 각목을 잡을 수 있었고, 마스크 없이 극장 먼지를 마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가 끝난 후, 허리 통증을 알콜로 소독한다며 웃으시는 선배님들의 얼굴을 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뒤 풀이에서 어떤 선배님은 내 잔을 채워주시며, '한 달 동안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니 역할을 했다'며 나와 건배를 하셨다. 그리고 힘들겠지만 버티라고, 버티는 게 오래 살아남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따뜻했던 저 말이 요즘엔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벤저스 선배님들의 웃는 얼굴만큼은 기억 어딘가에 선명하게 남아있어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스물아홉 2월, 평균 나이 45세 선배님들과 작업을 했다. 마흔 다섯 내 얼굴에도 그런 미소를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