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쓰는 거야?
작년 다이어리를 펼쳐 4월 셋째 주의 기록을 보니, ‘자기소개서 ㅠㅠ’라는 글귀가 남아있다. 그렇다. 집 근처 맨션에 흐드러져 핀 벚꽃이 하나하나 떨어질 무렵, 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었다. 불과 삼주 전에 사업자를 내고 지원서를 썼던 거 같은데, 이번엔 자기소개서라니. 나의 사월은 참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많았다. 앞 뒤 기록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잠시 생각 정리를 위해 다이어리를 덮었다. 빨간 겉표지에 묻어있는 지난 일 년간의 손때가 나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렇게 더럽지. 까맣게 변해있는 모서리에 지우개질을 하려다 보니 '빨간 머리 앤'캐릭터가 있었다. 불안한 스물아홉에 앤이 가지고 있는 긍정 에너지를 불어넣으려는, 과거의 내 의지가 느껴져 웃음이 피식 터졌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야심 차면서도 얼떨떨하게 사업자를 낸 나는 사업자 번호도 생겼겠다, 지원서를 제대로 써보고자 사업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하지만, 이게 웬 걸. 지난해 베스트 사례 발표를 보고 나니 이건 내 깜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우수한 전적으로 나를 좌절시킨 단체를 털기로 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고, 그 시작은 자료조사부터다. 열심히 단체 홈페이지를 비롯해 각종 웹사이트를 둘러보며 정보를 탈탈 털어내고 있는데, 게시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회혁신 청년활동가’ 양성사업공고. 응? 단어를 쪼개서 ‘사회’, ‘혁신’, ‘청년’, ‘활동가’ 각각의 뜻은 대충 알고 있지만, 조합된 단어는 뭔가 낯설었다. 친숙한 어휘로 만들어진 알쏭달쏭한 표현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회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청년활동가'
설명된 문구를 한참 바라봤다. 왜냐면, 내가 하는 예술활동의 목적과 비슷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지향하는 예술은 자연스럽게 개인을 자극시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비유다. 거부감을 느낄 새 없이 저절로 끌어당기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 내가 길러야 하는 핵심 능력인데, 난 아직 그런 내공이 매우 부족하다. 더군다나 예술의 공공성을 고민하기엔 뉴스도 잘 안 보고, 관심분야 편식도 심하다. 어쩌면, 그래서 ‘사회혁신’이라는 그럴싸한 단어에 구미가 당겼는지도 모른다. 골치 아픈 사회문제를 꽤 근사한 포장지로 감싼 느낌. 공고문을 보며 들어온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니터 화면을 잠식해나갔다. '사회 속에 속해 있으나 다르게 느껴지는 내 직업군. 청년예술가로서의 불안감. 예술활동과 경제활동을 병행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울산에 내려갔지만 갑자기 생긴 공백기. 내 기회비용. 안정된 경제활동에 대한 갈증.' 기대하는 것과 다르더라도 포장지를 한 번 뜯어보고 싶어 졌다. 운이 좋아, 이 일 경험을 통해 연극을 더 잘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도 있잖아.
오랜만에 연출 의도와 기획의도가 아닌 자기소개서를 썼다. 글이라는 게 그 형태가 어떻든 기본은 같겠지만, 자기소개서만큼 자신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끓어오르는 글짓기가 있을까? 다행히 취업준비생 남자 친구 자소서의 문맥과 흐름을 고쳐주는 피드백을 종종 해왔기에, 자소서라는 형식이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극을 하던 내가 이 사업에 지원하는 이유를 진솔하고 납득할만하게 쓰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야 했다. 내가 놓인 상황에 흔들릴 수 있어도,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자긍심은 놓치지 않는 대답들을 써 내려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글쓰기는 생각을 잘 정리해야만 쓸 수 있으니까. 허공에 뱉어낸 혼잣말을 고르고 골라 손가락에 담아 노트북 자판을 눌렀다. 수십 번의 고쳐쓰기를 통해 겨우 마음에 드는 자기소개서를 완성했을 땐 냉장고에 더 이상 캔맥주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 사업을 통해 겪게 될 일자리 현장 경험과 교육을 기회로 여기고, 특히 청년의 ‘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사회혁신 청년활동가와 청년예술가로서 앞으로 제가 마주 해야 하는 고민과 과정들을 사회의 도움을 받아 함께 해결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이 경험을 통해 ‘일’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공부를 가지고 제가 전공했던 분야와 다시 한번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고 싶습니다.
- 그날의 자소서에서 발췌 -
길어봤자 이주 정도 머무르다 울산으로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시작들이 울산행을 막아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며, 서울에서 단기 알바도 하고 오랜 골칫거리였던 사랑니도 뽑았다. 그러다 보니 벚꽃도 다 떨어지고, 사월이 훌렁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