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좋은 날
많은 음악을 자주 듣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귓가에 맴돌아버린 음악은 계속해서 찾아 듣는 경향이 있어요.
제 플레이리스트에는 오래도록 머물러있는 음악들이 있네요.
제가 그냥 흘려보내는 순간들을 대신, 기억해주는.
그래서 음악을 들으면, 다시 그 순간을 찾아내 주는.
시간이 되어 함께 흘러가버린 순간들을 기록하고 회고하며
당신의 순간도 꺼내고 싶게 만드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한 동안 <스물아홉월기>를 마감하느라, 스스로와 약속한 <음악이 찾아낸 순간들>을 제대로 업로드하지 못했다. 하루에 한 편, 나와 약속한 원고를 쓰는 일이 쉬울 것 같으면서도 늘 어렵다. A4 한 페이지 반 분량의 글쓰기에 실패할 것 같은 하루의 끝자락에는 이거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SNS 글귀를 쓰곤 한다. 그것도 내 글이니까. 그렇게 보낸 하루가 며칠이나 되었는지, ‘넌 감동이었어’ 활용백서를 썼던 날짜를 보고 깜짝 놀랐다. 20일 동안 내가 <음악이 찾아낸 순간들>에 해당하는 원고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아무리 <스물아홉월기>에 밀렸다고 한 들, 20일이면 거의 3주다. 일주일이 세 번 지나가고, 심지어 하나의 생리가 끝나고 다시 시작할 만큼의 긴 시간이었다.
뭔가 하겠다고 다이어리에 써둔 일정은 빼곡한데, 뭘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 뭐, 힐링 요가 자격증도 따고, 재밌는 만남도 있었다. 마음을 다잡겠다며 도서관을 가기도 했고, 여수에 요가 워크숍을 다녀오기도 했구나. 그래, 그 와중에 스물아홉월기는 10개나 썼네. 그것 참 다행이다. 이틀에 한 번은 약속을 지켜냈다. 펜 색깔을 바꿔가며 빽빽하게 기록한 다이어리를 쭉 훑어보니 짧지 않은 공백기가 잠시 수긍되기도 한다. 동시에 많은 일정을 소화했음에도 느껴지는 허한 기운에 들숨이 가득 들어와 가슴을 답답하게 채워낸다. 그래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휴대폰 보는 시간, 지하철 타는 시간, 게으름을 피웠던 나태한 시간의 조각을 모아 퍼즐을 맞춰보면 한 편은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괜히 내 자신을 한 번 쪼아보고는 그럴 수 있다며 괜찮다고 다독였다.
이 감정에 오래 빠져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엉덩이가 제자리를 잡아버린 소파에서 일어나, 딱딱한 책상 의자에 앉았다. 아직까진 겨울 기운이 남아있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외풍에서 들숨을 잡아들였다. 크게 마시고, 내쉬기를 반복. 세 번쯤 되풀이하다 눈을 크게 뜨니 ‘어설픈 거 이것저것 하지 말고 하나라도 잘해보자’라는 구절이 눈앞에 있었다. 문구를 벽에 붙인 테이프에 내려앉은 먼지를 보니 5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서울살이를 시작하던 날. 할 수 있다는 포부를 벗 삼아 온갖 명문장을 벽에 덕지덕지 붙이던 하루. 붙어있는 종이들을 따라가다 보니 당시, 정말 열심히 들었던 노래 제목이 나타났다. 빛바랜 아이유의 얼굴과 함께 적혀있는 ‘좋은 날’.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건지
오늘따라 왜 바람은 또 완벽한지
그냥 모르는척 하나 못들은척
지워버린척 딴 얘길 시작할까
주어진 상황과 달리 너무 예쁜 가사가 귓가에 채워지는 동안, 분명 슬픈데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도 모르게 열심히 웃게 된다. 어떤 일이든 좋게 포장하고 좋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 편이라, 들으면 들을 수록 이 곡이 마음에 들었다.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장거리 연애가 이별로 끝나서 느껴야 하는 허무함에, 낯선 골목길을 혼자 걷다가 신발 바닥에 붙어버린 외로움과 마주한 날, 다음 수업을 위해 읽어 내야 하는 책 무게가 버거울 때, 플레이리스트를 눌렀다.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리지 못하게 또 살짝 웃어
5년 전,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꽉꽉 채워 의미 있게 보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이것저것 할 일을 찾아내고, 움직였다. 체크표시를 하고 있는 것들은 많았지만, 제대로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일주일 씩 다이어리를 밀려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흘려보낸 하루가 마음 한편에 고여서 조금씩 냄새가 났다. 그러다 결국 난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3개월이 되던 날에 크게 아팠다. 갑작스럽게 만난 통증과 함께 병원으로 가던 날에도 좋은 날을 들었다. 파란 하늘과 완벽한 바람에 꼭꼭 숨어서 결과적으로 좋게 기억할 수 있는 날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말로, 좋은 표정으로, 좋은 날로 나를 다독였다.
애써 웃는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내 얼굴은 웃고 있었다. 따라 할 수 없는 3단 고음을 듣다 보면 가슴이 뻥 뚫렸다. 빨래를 널면서 들을 때면 하늘이 바로 붙어있는 옥상까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는 원래부터도 잘 웃는 편이었는데, 노래를 듣다 보니 저절로 훈련이 되어 더 잘 웃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서른이 되었고, 내 얼굴엔 미소 근육이 꽤 진한 농도를 띄며 자리 잡혔다. 이젠 필요할 때면 언제든 어렵지 않게 웃을 수 있고, 두터워지는 애교살, 올라가는 입꼬리가 자동 반사처럼 먼저 움직인다. 좋은 날은 나에게 좋은 가면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손쉽게 꺼낼 수 있는 좋은 가면.
감정표출을 어려워하지 않는 나에겐 때때로 이 가면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내 기분에 주객전도 되지 않기 위해서도, 내가 바라는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보고싶지 않은 부정적인 모습을 가려준다. 나는 그 뒤에 꼭꼭 숨어 잠시동안 편하게 쉴 수 있다.
어설픈 거 이것저것 하는 나는 웃는 것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생각해보면 <음악이 찾아낸 순간들>을 한 편도 쓰지 못했던, 지난 3주 안에서도 난 열심히 웃었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내 트레이드 마크 반달 입꼬리를 보이며 웃었고, 반납할 책을 안들고 왔을 때도 어이가 없어 웃었다. 스물아홉월기 상반기편 마지막 원고를 탈고했을 때도 신나서 웃었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좋은 날을 재생했다. 웃었던 기억들과 오랫만에 다시 들어보는 ‘좋은 날 3단 고음’이 나를 답답하게 채우던 허한 기운을 풀어준다. 노래를 듣다보니 또 입꼬리가 올라간다. 좋은 가면이 금새 만들어졌다.
웃는 표정을 앞에 두고 잠시 쉬다보니, 머릿 속에 시간과 함께 흘러갔던 기억들이 하나 둘씩 찾아왔다. 노트북을 열고 싶어졌다. 꽁꽁 숨어있던 반갑고도 안쓰러운 시간들을 오랜만에 안아주며 이 시간도 꾸욱꾸욱 손가락에 담아 키보드를 눌렀다. 오늘은 지난 3주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음악이 찾아낸 순간을 기록하는 '좋은 날'이다.
눈물은 나오는데 활짝 웃어
네 앞을 막고서 막 크게 웃어
이렇게 좋은 날
아이유, <좋은 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