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슬 Feb 06. 2021

첫 산부인과

지금도 산부인과에 가려면 며칠 전부터 마음을 먹어요.

내 인생 첫 산부인과 방문은 대학교 이 학년 여름이었다. 콧물이 묵직하게 코끝을 채워도, 칼칼한 모래알이 목구멍에 있는 것 같아도 병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걷지 못할 만큼 생리통이 심각하거나 이 주째 생리를 계속하거나 석 달째 생리를 안 하는 것도 아닌 데 산부인과라니. 하지만 나는 가야만 했다. 뜨거운 여름날 매일매일 극장에 모여 연극 연습을 하는 동료를 위해서, 기획이라는 직무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동아리 정기공연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 우리 동아리의 오랜 후원자인 윤 00 산부인과에 가야만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후원자 목록 중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그 산부인과를 두고, 버스를 타고 이 삽 십분 이상 가야 하는 치과와 한의원을 먼저 방문 후에 맨 마지막으로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내가 느끼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혹시나 산부인과로 향하는 발걸음에 누군가의 괜한 시선이 놓일까 봐. 낯선 눈빛 뒤에 어떻게 상상할지 모르는 생각과 판단이 드리울까 봐. 정작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혼자서 주변을 의식하고 긴장했다. 다리를 덜덜 떨면서 손에 들고 있는 공연 기획서를 꼼지락꼼지락 점점 구겨가는 나와는 달리 동행한 남자 후배는 배시시 웃으며 “선배, 이렇게 산부인과에 같이 앉아 있으니까 우리 신혼부부 같지 않아요? 아니면 사고 친 대학생 커플?"이라며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게 긴장한 나를 놀렸다. 신기한 듯 눈알을 굴리며 산부인과를 둘러보는 후배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넌 어찌 된 게 나보다 더 마음이 편하고 당당하니.’ 


단순히 성별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보다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산부인과 로비에 앉아있을 수 있는 남자 후배가 부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 그 녀석은 그 당시 내가 동아리 공연에 대한 홍보와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지원금을 못 받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으로 긴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내 마음에 여유를 주기 위해 그런 농담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고 잘할 수 있을 거라 말하며 해맑은 표정을 짓는 후배의 웃는 얼굴은 아이러니한 이미지로 기억 속에 남아버렸다. 물론 당시의 나는 쿨한 척 “너랑 사고를 쳤다니 내 인생이 암담하다.”라며 웃어넘겼지만 말이다.


다행히 산부인과 선생님은 앞서 치과와 한의원의 선생님들만큼이나 친절하고 따뜻하셨다. 공연을 잘 올리라는 말과 함께 젊은 우리의 여름날을 응원하는 마음을 하얀 봉투에 담아 주셨다. 덕분에 들어갈 때는 미묘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료를 받기 위해 산부인과를 방문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산부인과 간판이 걸려있는 곳을 향해 첫 발걸음을 떼는 것은 어려웠다. 


도대체 산부인과가 뭐길래.



매거진의 이전글 생리와 다이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