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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Feb 09. 2021

조직검사

이름이 참 무섭더라고요.

“고위험군에 속하는 59번, 52번 바이러스가 검출돼서 조직검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건강한 이삼십 대 여성은 자연스럽게 상피세포가 떨어져 나가는 방식으로 자연치유가 될 수도 있어요.”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인유두종 바이러스 결과 보고서에는 빨간색으로 고위험군, 초록색으로 잠재 고위험군, 파란색으로 저 위험군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과란에 ‘High risk HPV : 52, 59’가 쓰여 있었다. 색깔이 세 가지나 있는데 어쩜 저렇게 편식을 좋아해서 빨간색에만 다 모여있다니. 결과지를 보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게다가 52번 바이러스는 자궁경부암 예방주사 백신 중 가다실 9가 에서 예방할 수 있는 바이러스다. 대학 시절 총여학생회에서 추진했던 자궁경부암 주사를 아프다는 동기의 말에 맞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지난봄에는 시중보다 저렴하게 자궁경부암 주사를 맞을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같이 맞자는 친구의 제안을 귀찮아서 맞지 않았던 것도 떠올랐다.


인유두종바이러스에는 물리적으로 약을 처방하거나 따로 치료법이 없다고 하셨다. 자연치유밖에 방법이 없고, 혹시나 바이러스가 여러 번 재감염돼서 조직을 파괴하면 도려내는 방법이 있고, 그러다가 심각해지면 암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하셨다.  암이라는 것이 자고 일어나면 발전하는 건 아니니까 앞으로 조금 더 지켜보자고. 


“조직검사는 어떻게 하나요?”

“자궁경부에 초산을 뿌려서 표피를 조금 뗄 거예요.”

“네??? 생살을 땐다고요? 마취는 하나요?”
“마취를 따로 하지는 않아요.”


잘 모르지만 초산은 왠지 매우 따갑거나 자극적일 것 같았고, 거기에 생살을 뜯어낸다고 생각하니 고통을 기억하는 근육이 매우 크게 활성화되는 느낌이었다. 고위험군 바이러스에 조직 검사까지 닥치자 정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게다가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인유두종바이러스는 성관계를 통해서 전염된다고 알려졌어서 마치 내가 나쁜 행동이나 안 좋은 일을 겪은 듯한 느낌이 막연하게 들었다. 사실 성 경험이 전혀 없는 여성에서의 감염도 보고된 만큼 성관계 이외의 경로에서 감염이 확인되었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원인으로 성관계를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스스로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느낌에 나를 가둘 수밖에 없었다.


머리속으로 첫 성 경험부터 지금까지 나와 잠자리를 함께했던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역학조사를 하듯 그들에게 인유두종바이러스검사를 하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남성의 성기는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감염이 있어도 각질이 떨어지듯이 자연 소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더더욱 자궁경부암예방접종은 남자분들도 꼭 맞아야 하는데, 정작 이름이 ‘자궁’ 경부암 예방접종이라 자궁이 없는 남자들은 맞아야 한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한다. 안 들 것 같았다. 그럴 거면 그냥 ‘인유두종바이러스예방접종’이나 ‘인유두종바이러스 백신’이라고 이름을 지으면 되지 왜 ‘자궁경부암예방접종’이라고 불러서 서로서로 꺼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루라도 빨리 다음 검사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인유듀종바이러스검사 결과가 나온 당일이 생리 둘째 날이었다. 조직검사를 할 수 없는 자궁의 상태 덕분에 애타는 마음만 가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생리가 끝나는 일주일 뒤로 조직검사 일정을 예약하고 병원을 나섰다. 


 조직검사를 기다리는 일주일간 나는 정말 매우 쫄았다. 이미 조직검사를 받은 경험이 있는 한 친구는 “그렇게 아프지는 않지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아.”라고 후기를 전해주었다. 잠시 멍 때리다 나도 모르게 생긴 빈틈으로 조직검사에 대한 생각이 훅 들어오면 부르르 몸이 떨리곤 했다.


투병생활을 시작한다는 이유 아래, 드문드문 마시던 술을 일주일 동안 먹지 않았다. 웬만하면 늦게 자려고 하지 않았다. 혹시 잠이 부족한 거 같으면 더 자려고 애썼다. 건강 요거트 가게를 찾아가기도 했다. 술 약속을 잡으려던 후배는 커피나 차를 마시자고 말했다. 달라진 내 일상을 옆에서 지켜보던 동생은 힘내라고 꽃 한 송이를 사다 주었다. 


일주일 동안 청승을 충분히 떨었더니, 정작 조직검사 당일에는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몸으로 느껴지는 아픔은 없었다. 다만, 검사 후 약 일주일이 넘도록 빨간색, 자주색, 버건디색, 벽돌색, 갈색을 띠는 부정출혈이 나왔다.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따라 평소에는 없던 생리통과 두통이 뒤따라왔다. 무의식적인 스트레스가 몸속 어딘가에 깊게 똬리를 튼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나 멎을 생각을 안 하는 피를 만나니 정말 내가 자궁경부암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식을 들은 엄마는 당신의 자궁이 튼튼하니까 너무 신경을 쓰지는 말라고 하셨다. 자궁은 유전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데, 당신을 닮아서 너도 생리통이 없지 않느냐고. 건강한 자궁을 물려주었으니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어느 순간 나는 엄마처럼 고사리와 곶감을 좋아하게 되었고, 엄마처럼 뭘 좀 잘못 먹었다 싶으면 예민한 장트러블에 시달렸다. 그걸 보면 왠지 엄마의 말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여전했다. 



가다실 9가 : 사람 유두종 바이러스 6,11,16,18에 추가로 31, 33, 45, 52, 58에 대한 백신, 재조합 사람 유두종 바이러스 9가 백신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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