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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Feb 09. 2021

검사결과

사과 같은 내 자궁 예쁘기만 하여라~

자궁경부이성형증 CIN1기


조직검사에서 나온 내 병명이다. 상피세포에서 이상세포 병변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궁경부암 단계는 ‘정상 - CIN1 - CIN2 - CIN3 - 암1기 - 암2기 - 암3기’로 나뉜다. 정상으로 돌아갈 확률이 칠십 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로 높고 CIN2기로 넘어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CIN2기로 넘어가는 순간 다음 단계들은 시간문제라고. 전체 진행상황을 기준으로 한다면 비교적 정상에 가까운 상태에 있지만, 내 몸이 ‘정상’ 범위를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다가오는 느낌은 매우 달랐다. 마치 내가 숨 쉬고, 마시고, 먹고, 입고, 자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건강한 자궁은 빨갛게 잘 익은 사과처럼 동그랗고 불그스름한 혈색이 느껴져요.”
선생님의 설명에도 내 머릿속에는 한 소절의 노랫말만 맴돌았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만 하여라…’
‘사과 같은 내 자궁 예쁘기만 하여라…’
‘사과 같은 내 자궁 건강하기만 하여라…’
 
선생님께서는 지금 단계에서는 별도의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며, 우선 스트레스를 다스리고 면역력을 챙기라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십 대 여성은 각질이 떨어지듯 이상세포 병변이 일어난 표피세포가 자연적으로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내 몸을 믿어보자고. 아직 나는 젊고, 우리 몸은 안정적인 상태를 능동적으로 유지하면서 스스로 회복하는 성질도 가지고 있으니 삼 개월 뒤에 다시 검사해서 자궁을 살펴보자고 하셨다. 


앞서 세포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타나고 인유두종바이러스가 두 개 검출됐다는 결과를 들었을 때, 상상한 적도 없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긴장한 몸을 푸느라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그런지, 최종적으로 조직검사 결과를 듣고 ‘자궁경부이성형증’이라는 병명을 진단받자 더는 휩쓸릴 마음도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치료는 없었고 이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앞으로는 나 스스로 면역력을 높이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내 삶의 패턴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당장 내가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면역력이 어떻게 얼마나 떨어졌는지 자각하기 어려웠다. 지금 내 자궁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불안전한 심리적·신체적 상태가 있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장작 나는 원인을 명확하게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나 잘 지내고 있는 거 아니었나?’


타인에 눈에는 내가 쉴 새 없이 바쁘게 보일지라도 정작 나는 (가끔 새벽까지 눈 떠있기는 했지만) 남들이 출근하는 평일 오전에 늦잠도 자고, (맥주를 비롯한 내 취향의 음식들만 골라서 먹기는 했지만) 음식도 충분히 잘 챙겨 먹고, (개인 수련보다는 수업 중에 운동을 더 많이 하기는 했지만) 요가강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꽤 많이 움직이는 편이었다. 먹고 자고 운동하는 것을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겉만 튼튼하고 속이 텅텅 비어있었나 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일상을 재정비할 필요성이 있었다. 당장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을 깊숙하게 들여다봐야 했다. 


재검사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백일. 곰이 사람이 되는 기간 동안 내 자궁을 다시 불그스름한 사과로 돌려놓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추상적인 내 인생계획에 그나마 명확하게 존재하는 결혼도 출산도 양육도 구체적으로 꿈꿀 수 있다.  


검사결과가 나온 날, 또 한바탕 주변 지인들과 연락을 했다. 내가 먼저 호들갑을 떨며 투병생활을 알렸던 몇 주 전과 달리 이번에는 지인들이 먼저 내 생일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안부를 물어왔다. 감사했다. 정상범위에서 살짝 벗어난 자궁을 보살펴야 하는 다소 슬픈 일상 속에 주변의 관심과 걱정이 있어 힘이 되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들여서 내 자궁에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자궁을 더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질환은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확률이 높다는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지인들에게 쉽게 토로하기 어렵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판단받고, 오해할까 불안해서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쉽다. 나 또한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워 오히려 더 주변 사람들과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실제 몇몇 사람들에게서는 어떻게 몸 관리(?)를 했는지, 혹은 “여러 사람하고 잠자리를 가지지는 않았잖아?, 피임 제대로 안 했어? 야, 이제 빨리 결혼해야겠네.” 등등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러게 말이다. 내가 욕구에 충실하며 살다가 이런 일을 겪는 거면 억울하진 않을 텐데, 그렇지?” 이렇게 받아쳤다. 더불어 몇몇 남성 지인들에게는 현재의 여자 친구와 미래의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자궁경부암백신을 꼭 맞으라고 덧붙였다. 


특히, 만우절에 이 소식을 거짓말처럼 듣고 천운이라고 본인이 더 긴장된다고 말했던 친구도 있었다. 병원에서 오는 문자만큼 꼬박꼬박 귀찮게 연락하며 나의 검사 일정을 챙기고, 결과도 알려 달라며 안부를 물어봐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자궁경부이성형증CIN1기 : CIN 자궁경부 상피 내 종양 [cervical intraepithelial neoplasia] 자궁경부 상피에 국한하여 암세포로 변화되고 있는 중간 단계의 이형 세포들이 존재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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