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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Feb 22. 2021

금주령, 금식령

아니! 못 마시고 못 먹는다고?

오랜 기간 자취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오랜 자취 생활을 통해 요리왕으로 거듭나거나, 방치에 가까운 자취 생활 때문에 환자가 되거나. 안락한 부모님 집을 떠나 상경한 지 육 년 차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맞벌이하셨던 부모님 밑에서 분명 요리왕이 될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난 요리에 썩 재능이 없었다. 대신 내 식습관을 믿었다. 


나는 육류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고,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달달한 디저트나 시럽과 휘핑크림이 들어간 카페 메뉴도 거의 시키지 않는다. 맵고 짠 음식은 먹고 나면 갈증이 생겨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했기에 자주 먹지 않았다. 이렇게 살펴보면 꽤 괜찮은 식습관을 가진 것 같은데,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허점이 있었다.


육류를 좋아하지 않는 대신 어류가 들어간 참치마요와 게살딱지장 삼각김밥을 즐겨 먹었으며, 달달한 디저트와 시럽과 휘핑크림이 들어간 카페 메뉴 대신 아메리카노와 맥주를 매일 마셨다. 갈증이 생겨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하는 맵고 짠 음식 대신해, 조금이나마 매운맛이 덜한 순한 맛(내가 가장 좋아하는 진라면 컵라면은 매운맛과 순한 맛 두 종류가 있다.) 컵라면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먹었다. 


다시 말해 밖에서 외식하지 않는 날이면, 집에서 편의점 간편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먹었다. 때로는 밖에서 거한 식비를 들여서 먹는 외식보다 삼각김밥에 컵라면이 맛있다고 느낄 정도로 편의점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졌다. 그리고 거의 매일 맥주를 한 캔 이상 마셨다. 맥주를 먹기 힘든 날이면 탄산수로 대체할 정도로 그 시원한 목 넘김을 좋아했다. 인정한다. 그다지 괜찮지 않은 식습관이다. 어마어마한 허점을 가진.


나아지기 위해서 이 괜찮지 않은 식습관을 재정비하는 금주와 금식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이별과 같은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 부닥치지 않는 이상 먹고 마시는 것을 제한해본 적이 없다. 그마저도 의지를 갖고 스스로 제한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서 제한당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안 좋아하는 음식이 많다 보니 반대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욕구가 꽤 강한 편이다. 편식하지 않는 듯 보이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편식증이 있는 사람이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해서라도 제한을 해야 한다. 나의 자궁을 위해. 우선 맥주를 비롯한 여러 알코올 섭취를 당분간은 없애야 했다. 그리고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비롯한 편의점 간편식이랑 안녕을 고했다. 나에겐 일반식과 같은 메뉴들이라, 금주와 금식을 시작한 초반에는 자연스레 살이 빠져 내 투병 소식을 알고 있는 몇몇은 내가 병에 전투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해와 걱정을 했다. 코로나로 다들 집에만 있어서 전 국민의 체중이 증가하여 평균 4.9kg가 찐 가운데, 너는 왜 더 빠진 것 같으냐고. 하지만 우리 몸은 환경 변화에 꽤 적응을 잘한다. 나는 컵라면과 김밥이 사라진 자리에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우유로 대체하여 빠진 몸무게를 돌려놓았다.  


조직검사 이후 다시 추적검사가 진행될 때까지 삼 개월 동안 나는 오랜만에 연극 작업에 참여했다. 공연 준비는 밤샘 작업과 각종 간편식 등으로 면역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환경을 선사하기 때문에 이 중요한 기간에 연극 일을 할지 고민했지만, 요가와 글쓰기에 묻혀 잠시 빛바랜 내 첫 번째 직업에 다시 햇볕을 내리쫴 주고 싶었다.  


걱정했던 마음과 달리 다행스럽게도 코로나 19 때문에 공연팀의 회식자리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술자리가 거의 사라졌다. “오늘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면 싸해지는 분위기를 피하고자 “저, 원래 술 잘 못해서요.(그래, 이건 거짓말이다.)”, “약을 먹고 있어서 당분간은 금주 중이에요.(이마저도 알코올 성분이 상처를 소독한다며 먹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하며 거절을 잘 못 하는 나로서는 술자리 자체가 사라진 것이 금주령을 지킬 엄청난 기회였다. 그리고 집에서 마시는 술은 동생들이 빼앗았다.


독일에서 교환교수 생활을 하신 연출 님은 그곳에서 김밥과 컵라면을 대체할 어마어마한 식습관을 찾아서 돌아오셨다. 바로 아주 간편하게 만드는 샌드위치다. 직접 크루아상과 치즈, 각종 채소가 들어있는 샐러드, 살라미, 토마토, 발사믹 소스, 랜치 소스를 사 오셔서 샌드위치와 카프레제를 만드셨다. 연습실에서 심지어 공연장 로비에서도 연출 님과 함께 샌드위치를 여러 차례 만들었다. 나의 금식령을 모르고 계셨지만, 연출 님 표 샌드위치는 인스턴트 금식령을 지킬 엄청난 기회였다. 그러는 동안 집에 있는 컵라면은 동생들이 다 먹었다.


덕분에 한동안 금주령과 금식령을 비교적 잘 지켜낼 수 있었다. 여러 도움으로 금주령은 약 한 달, 금식령은 약 한 달 반 가까이 실천했다. 당시 나는 공연팀에 객원멤버로 들어가 함께 공연을 준비하는 팀원들에게 속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꺼려졌다.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껄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게 내 금주령과 금식령을 지킬 수 있도록 코로나 지침을 잘 따라준 단원들과 건강한 대체식을 마련해주신 연출님께 감사를 전한다. 더불어 이 자리를 빌려 제일 마음이 헛헛하고 어려운 시기에 매일매일 함께 작업했던 동료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전 국민의 체중이 증가하여 평균 4.9kg가 찐 가운데 : "2명 중 1명은 코로나 확'찐'자.. 평균 4.9kg 증가", <파이낸셜 뉴스>, 2020.09.18, https://www.fnnews.com/news/202009181342158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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