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시 May 28. 2020

자족하는 삶에 대해

삶의 여유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2016년 여름, 나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나라인 태국 치앙마이로 여행을 떠났다. 내가 그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를 말하면 듣는 사람들마다 웃었는데, 나에게는 정말 단 하나의 유일한 이유가 있었다. 숲 속의 나무집 'Enough for life (이너프포라이프)'에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너프포라이프는 'Bankangwat (반캉왓)'이라는 예술인 마을에서 태국 남자와 결혼한 한국인 사과씨네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다. 이너프포라이프는 태국의 전 국왕인 푸미폰 아둣야뎃이 전한 피앙퍼 정신(만족하는 삶)을 삶으로 실현시키고 싶어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 사과씨의 귀여운 세 아들의 이름(피앙퍼, 퍼피앙, 퍼디) 또한 자족하는 삶을 뜻하는 단어이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회에서 한 반짝 물러나 자신에게 맞는 삶의 속도를 찾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과씨의 단단한 마음이 느껴지는 이름들이다. 숲 속에 둘러쌓인 이너프포라이프의 사진을 처음 딱 봤을 때, 이 곳이라면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고민과 들끓는 갈망들을 모두 가만히 내려놓고 어슬렁어슬렁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만끽하고, 내 마음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따라 걷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생각했고, 바로 티켓을 끊었던 것이다.



이너프포라이프에 도착해 시간을 보내며, 어라운드 매거진에 소개된 주이킴님의 글을 읽었다. 그녀가 이너프포라이프를 처음 만나게 된 여정부터 이너프포라이프가 추구하는 가치 '퍼피앙 정신'에 대한 설명, 그녀가 사과씨와 함께 이너프포라이프를 하게 된 이야기까지 담겨 있었다. 전 국왕의 <자족하는 삶>에 대한 연설과 머무는 시간 동안 자족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마무리 문장을 여행 마지막 순간까지 머리와 마음에 새겼다.







태국 전 국왕 푸미폰 아둣야뎃의 연설

 경제 개발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태국 국민의 전 계층이 생활하기에 충분한 정도로 경제 기반이 강화된 이후에 합리적인 방법으로 다음 단계의 경제 개발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호랑이(경제 대국)가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만족하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삶이란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도울 수 있을 정도로 경제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 마을과 지역이 소외됨이 없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물러서서 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부탁드립니다. 절제와 평화를 우리의 목표로 세우고 함께 노력합시다. 태국은 지나치게 번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중용의 가치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있다면, 태국은 위대한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어라운드 2016년 6월호 중에서>






 치앙마이를 여행하는 내내 나는 만족하는 삶을 누렸다. 숲 속 나무집만을 보고 떠나온 여행에 계획 같은 게 있을리 만무하다 보니 욕심 낼 것이 없었다. 그저 현재를 충실히 즐기면 되는 일이었다. 빡빡하게 움직여야 할 일정이 없으니 마음에 여유가 흘러넘쳤다. 내 시간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움직이고 싶은 시간에 움직였다. 길을 걷다 가고 싶은 카페를 발견하면 들어가 몇 시간이고 생각을 끄적이고 사진을 찍다 카페에서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몇 시간이고 시간을 낭비했다.


 선데이마켓을 놀러가서는 시장 어귀에서 팟타이 1인분을 시켜 먹고는 이런 저런 예쁜 아이템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만났다. 우산도 없었는데 한 쪽에 마련된 휴게 공간에 몸을 잠시 숨겼다. 평소 나 같았으면 여행을 왔는데! 왠 비야! 이거 봐야되는데! 라며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웃으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그러다 치앙마이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했다. 마켓에서 물건을 판매하던 상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나기가 내리면 물건이 젖기도 하고, 오늘 매출을 올리지 못한다는 마음에 속상할 법도 한데, 잠시 비를 피하며 옆 동료들과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여행을 하며 아름답지 않은 풍경이 있겠냐마는, 소나기가 내리던 선데이 마켓 상인들의 미소를 여전히 기억한다. 삶의 고된 풍파 속에서도 미소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현실로 복귀한 내 삶은 언제 치앙마이에서 만족하는 삶을 살았냐는 듯 금새 미소를 잊어버렸다. 범계에서 논현까지 왕복 3시간을 지옥철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다닐 때는 미간에 주름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화장실 거울 속 내 모습-헝클어진 머리, 충혈된 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안쓰러워졌다. 뭘 그렇게 애쓰고 있느냐고, 행복해질 수는 없는거냐고 거울 속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누군가 말을 걸 때 무표정인 내 얼굴이 나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면 치앙마이를 호젓하게 거닐곤 했던 그 느릿한 공기와 사람들의 미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쉬는 것도 계획이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