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인 6년 차의 방황기 <불안했던 날들의 기록>
나는 뭐든 좀 느린 편이다. 중대한 일부터 아주 사소한 일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내겐 꼭 필요하다. 쇼핑을 할 때에도, 누군가에 대화를 나눌 때에도, 점심 메뉴를 정할 때에도 모든 순간이 그렇다. 빠른 판단과 결정,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광고업에서 이런 나의 성격은 고민을 유발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였다. 나의 성향에 맞게 나는 나만의 속도로, 꽤 오랜 시간 이 업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몸으로 부딪혀보며 '맞다 아니다'를 반복하는 시간을 보내왔는데. 2018년 5월의 어느 날, 그동안 쌓아왔던 감정들이 폭발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수치를 넘어버린 것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AE가 해야 하는 일은 정말 디테일하면서도 많은데, 그 하나하나를 신경 쓰다 보면 멘탈이 탈탈 털린다. 클라이언트, 내부 리더십들, 프로덕션, 외주업체, 계약서 관리, 정산, 최종 결과물까지 관리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모두가 생각하는 다른 그림을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나가기 위해 중간 입장에서 의견을 조율해 나가는 일도 쉽지 않고, 최소한의 예산 안에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네고를 할 줄 아는 협상력도 갖춰야 하는데 나의 성격과 반대되는 이 모든 일들을 해나가려고 하니 -성격 상 빠른 판단력, 빠른 실행력을 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해결해내는 AE들도 많다- 그 일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버거웠다. AE라는 역할은, 각각의 악기들로 음악을 쌓아 올리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 같다가도, 남들이 멋지게 그림을 그릴 동안 뒷정리를 하는 아주 시시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동료들과 우스갯소리로 AE는 '아 이것까지 제가 하나요?'의 줄임말이라며 웃었는데. 정말이다. AE는 세세하게 챙겨햐 하는 일이 정말 많다. 조금 과장해서, 이걸 완벽하게 하려면 울트라 초특급 어벤저스일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렇게 무지막지한 정도의 스트레스까지 받아가며 일해야 하나, 정말 이대로는 못 견디겠다. 못하겠다. 꽁꽁 숨겨왔던 감정들이 봇물처럼 터졌다. 에라, 모르겠다. 마음 가는 대로 하자. 못하겠으면 못하겠는 거야!! 말하자! 바쁜 업무를 쳐내다가,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팀장님께 면담 요청을 하고 퇴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입사 후 지금까지 사내 멘토로 늘 언니처럼 걱정해주시던 팀장님은 갑작스러운 나의 고백에 충격을 받았고, 상처를 받았을 법도 한 상황에서까지 언니처럼 내 앞길을 걱정해 주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했으나, 그만두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원체 애매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뚜렷하게 열망하는 일이 없었기에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갔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살아지는 대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항상 동경하기만 했다.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미래 가치가 있는 일의 교집합을 잘 찾아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선택의 기로 앞에서 걱정과 불안이 앞섰다. 잘못되면 어쩌지, 실패하면 어쩌나, 부모님께는 뭐라고 하지, 결혼 못하면 어쩌지, 재취업 너무 힘들다고 하던데, 다들 넥스트를 준비하고 나오라고 하던데, 이렇게 무턱대고 계획 없이 그만둬도 되는 걸까,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철이 없는 걸까. 온갖 걱정과 고민들이 쏟아져 나왔고, 확신이 없는 내 마음 때문에 주변 사공들의 말에 나는 쉽게 흔들렸다. 본질은 간단했다. 지금 하는 일에 대한 무의미함, 내가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들이 다른 언덕 너머에 있을 것만 같은 생각들이 자꾸 머리를 뒤덮어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내 몸이 아픈 것도, 누군가가 날 떠난 것도 아닌데 이유 모를 눈물이 수시로 흘렀다. 엄마 생각하며 눈물 픽, 날 생각하며 조언해주는 팀장님과 대표님 얘기에 눈물 픽. 그때마다 결심은 수백 번 바뀌었다. 남아 있자, 다른 팀으로 옮겨보라는 제안을 받아보자, 아니야 나가야 해, 아니야 남아서 넥스트를 좀 더 준비해볼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여전히 어떤 선택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팀장님이 조언해주신 것처럼 좀 더 나를 믿고, 나의 선택을 믿고 지금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들 수 있는, 그리하여 그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다.
- 2018년 5월 일기 중 -
너무 감정만 앞서 충동적으로 고백하게 된 퇴사 이야기. 며칠이 지나니 도대체 내가 왜 그 얘길 하게 된 건지, 앞으로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만약 그만두게 된다면, 상상하며 생각해 보았던 것들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퇴사 고백을 한 이후로는 눈 앞이 흰색 도화지 같았다. 막상 눈 앞에 닥친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원하던 자유도 암흑이었다. 시간 단위로 내 생각은 왔다가 갔다리 했다. 퇴사 얘기 잘했어! 앞으로 쉬면서 생각해 보면 되는 거야. 아니야... 뭐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 나겠어. 난 후회하게 될까?라는 걱정과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품고서 엄마에게도 회사에 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회사를 왜 그만둬! 결혼할 때까지 좀만 더 다녀봐. 넌 왜 그렇게 항상 힘든 길을 택하니!"
나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인 엄마한테 공감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니 슬픔과 혼란은 커졌다. 엄마는 항상 나의 행보에 반대했다. 내가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를,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내가 교사자격증을 따기를 바랐으니까. 퇴사를 이야기하는 이 순간마저도 엄마는 날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수룩한 딸처럼 생각하셨겠지? 부모님께 자랑스럽고 멋진 딸이 되고 싶은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날 밤은 새벽 내 차오르는 슬픔을 감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