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색

서른 중반에 시작한 도쿄 생활, 그 풍경에 관하여

by Parkers

도쿄에 온 지 어느 덧 반 년이 되었다.


많은 것들이 낯선 외국 생활에 적응하고 업무 파악하느라 그간 참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반 년 정도 살아보니 도쿄 생활의 윤곽이 머릿속에 잡힌 느낌이다. 앞으로는 그간의 일상과 앞으로의 변화에 관해 조금씩 글을 남겨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 브런치에 종종 기록을 해보고자 한다.


내가 거주하는 시나가와구(品川区)에서 미나토구(港区)로 출근하는 길은 거의 항상 같은 풍경이다. 엄청난 인파로 북적이는 도쿄 지하철 안에 들어서면 서로의 어깨가 맞닿고, 발이 밟히고,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역에 내려서야 비로소 맑은 공기를 조금 마실 수 있다.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행렬,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줄, 횡단보도 앞에 모인 군중을 보며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서울도 사람이 많지만, 도쿄는 정말 체급이 다르다는 걸. 많다는 것을 넘어서 압도적인 거 같다.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에 따르면 도쿄대도시권의 인구는 약 3500만 명. 도쿄도로만 한정해도 1400만 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그런데 도쿄는 세계적인 관광대국인 탓에 늘상 외국인 관광객이 북적여서 체감 인구는 그 이상이다. 엄청난 인구에 비해 도보의 폭도 좁고, 지하철역의 층고도 낮아서 피부로 느껴지는 인구 밀도도 엄청나다.


유명 관광지인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처음 건넜을 때가 기억난다. 신호가 바뀌면 사방에서 천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각자의 방향으로 걷는다. 스크램블 근방의 스타벅스에 가면 그 엄청난 유동인구의 파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 그걸 보면 아마 그 누구라도 경악하게 될 것이다.


사람더 많지만 시부야역이나 신주쿠역의 구조를 생각하면 그저 막막해진다. 지상이든 지하든 복잡도가 미로를 방불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부야역의 출구 개수는 무려 200여 개. 구글 맵도 도움이 안 될 지경이다. 실제로 나는 신주쿠역 지하에서 길을 잃어버려 오사카로 가는 버스를 놓칠 뻔한 적도 있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역내의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 갈라지는 길, 표지판들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그곳에 서서 가만히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런 상념에 빠질 때도 있다. 저 사람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국적에 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에는 정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중국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는 거의 마주친 적 없는 국적의 사람들도 많다. 파나마인, 이란인, 홍콩인, 베트남인 등. 내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사람만 해도 그 정도다.


그들은 왜 하필 일본, 특히 도쿄를 선택했을까. 이 도시는 왜 이렇게나 사람이 많고, 도대체 무엇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도쿄로 끌어모으고 있는 걸까. 잃어버린 20년, 디플레, 저금리 등의 수식어가 붙는 일본에 왜 사람들은 공부하러, 일하러, 살러 오는 걸까.

회사 앞에서 찍은 도쿄타워.

아무튼 반 년 정도 살아보니 대부분의 것들에는 익숙해졌다. 페이 앱을 사용하는 법, 식비를 절감하는 법, 투자하는 법, 미용실에서 요청하는 법 등등. 일본어 타이핑 속도 그리고 눈치라는 게 늘면서 업무도 그럭저럭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사회 시스템은 한국에 비해 느리고, 비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은행/증권 계좌를 개설하려면 지점에 직접 가거나 우편을 보내야 하고, 전입-전출 신고 때 관공서에 직접 가야 한다. 뭔갈 하나 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건 기본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런 불편함을 딱히 불편으로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은행 창구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종이 서류를 몇 장씩 작성하는 것도, 빼곡하고 작은 글씨로 점철된 일본 앱의 UX도,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어느덧 나는 그 방식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라쿠텐 버스예약앱.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불편한 것이 많은 나라에서 나는 무엇을 경험하면 좋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국에 있는 것은 일본에도 대부분 있다. 충전이 가능한 카페도 있고, 소위 말하는 맛집도 많고, 모바일 뱅킹도 가능하고, 학원 시스템도 있다. 대체로 느리고, 비효율적일 뿐 물리적인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경험을 해야 가치를 느낄 수 있을까.


내가 내린 답은 사람이었다. 일본인을 포함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일본어나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이를 통해 그들의 나라와, 그들의 시각, 배경, 관점을 배우는 것.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며 교류하는 것. 그것이 내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은 됐을지언정 아직 모르는 것이 많고, 어색한 것이 많고, 배워야 할 것이 많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이 나라에 합법적으로 체류 가능한 3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누구와 어떤 관계를 구축하고, 세계관이 어떻게 변해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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