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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신 Feb 20. 2020

이창동 감독 [시詩]: 삶이라는 죗값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삶(life)과 시(poetry)의 관계를 처연하게 드러내는 영화다. 보통의 사람들이 시를 숭고한 문학 장르라고 여기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시가 사실 인간의 시궁창 같은 삶에 뿌리박고 피어난 더럽고도 아름다운 꽃이라는 점을 말한다. 시쓰기라는 행위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으며 고통스런 삶이 매개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의 진실이며 시를 시답게 만드는 요소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60대 중반의 할머니 미자(윤정희 분)는 시를 쓰고 싶어 시창작교실에 등록한다. 시가 아름다움의 소산이라고 생각한 미자는 주위의 꽃이나 열매를 열심히 관찰하며 사물 속의 아름다움을 포착해내려고 한다. 그런데 어쩐지 미자는 시를 잘 쓰지 못한다. 시로 표현할 언어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의 본질이 더러움과 고통 속에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 <시>는 시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미자의 삶을 어둡고 칙칙하게 그려낸다. 홀로 키우는 손자는 망나니인데다가 집단 성폭행을 저질러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도 죄의식이 없다. 성폭행 가해자 부모들은 합의금으로 사건을 무마해 소녀의 죽음을 흐릿하게 만들려 한다. 또, 미자가 간호하는 강 노인은 비아그라를 주며 미자에게 육신의 정욕을 풀고 싶어 한다. 아름답고 고운 외모에 꽃무늬 옷을 입고 다니는 미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하자면 시궁창 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자가 그런 시궁창 같은 삶을 살아낼 때 비로소 시는 탄생한다. 강 노인에 의해 몸이 더럽혀지고, 성폭행 당해 죽은 소녀의 절망과 고통을 추체험함으로써 비로소 그녀는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나는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미자에게 주어진 부박한 삶은 어쩌면 그녀가 손자를 대신해 치러야 할 죗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자가 치러야 할 그 죗값을 모두 치름으로써 미자는 비로소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더럽고 추한 삶 속에서 태어난 시는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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