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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Jun 19. 2024

K 장남, 우리 오빠


'자식은 몇 명이나 되나요?'

하고 물어보면

'3남 2녀, 500점입니다'라고 엄마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500점은 왜 들어갔는지, 스스로 자랑스러운 마음을 숫자로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지금의 저출산율을 고려한다면 표창장을 주어야 될 점수이다.

하지만 나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세대에 태어났기에 우리 집의 형제자매수는 좀 많지 않나, 엄마 아빠는 왜 이렇게 사랑이 넘쳐 우리를 많이 낳으셨나 생각했었다.

나는 홀로 사랑받는 외동딸이었음 했다.

내 서열은 밑에서 세야 빨랐으니 엄마의 관심은 큰오빠, 작은 오빠 그리고 언니한테 먼저 가 있었고, 나도 많이 많이 관심받고 싶었다~.


딸 많은 집에 셋째 딸로 태어난 엄마에게는 큰 아들이 귀하고 귀했다.

지금도 이렇게 하시게나~ 하며 높임말을 하실 정도다.

모두 엄마가 낳은 자식이지만 그래도 어려운 자식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큰 오빠가 엄마에게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큰 오빠가 코를 찔찔 흘리며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

'엄마, 나 나중에 크면 우리 엄마한테 반짝반짝 예쁜 빼딱 구두 사드릴게요.'라고 했단다.

엄마는 어린 아들이 출세해서 굽이 높은 예쁜 구두를 사주겠다고 하니 기특하고 대견하기만 했었다고 한다.


늘 북적이던 집이었는데,

장남인 큰 오빠는 내가 철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 교육열 높은 엄마 덕에 일찍 부산으로 진학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생도 어린 나이였는데, 부산까지 유학을 보냈으니 엄마의 기대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큰오빠는 신문물을 접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선각자 같은 이미지였다.

어쩌다 방학이 되어 오빠가 남해에 오면 동생 네 명을 앉혀놓고, 가끔 마요네즈가 듬뿍 들어간 사라다를 해주었다.

곤로불위에 후라이팬을 올리고 식빵을 버터에 구우면 시골에서 한 번도 맡은 적이 없었던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처음 맛보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어린 내 눈에 큰오빠는 당시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빠른 흐름을 받아들이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객지 생활이 힘들었을까 큰 오빠의 공부는 엄마의 기대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12월 학력고사가 끝나고 엄마가 몸져누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엄마가 겨울에 크게 감기에 걸린 줄 알았지만, 자식교육에 최선을 다했으나 기대에 차지 못한 상실감에 몸져 드러누우신 게다.


나이터울이 있어 큰오빠와의 유년의 기억은 많이 없지만,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큰 오빠가 용돈을 가끔 주었던 기억이 난다.

오빠가 이만 원, 삼만 원을 봉투에 넣어 공부 열심히 하라며 편지를 써주곤 했다.

장남으로서 공부하는 동생들까지 돌본 것이다.


엄마가 아프시면서 큰오빠의 장남 역할은 하기 두 배가 되었다.

형제들을 아우르고, 아버지를 챙기고

엄마 형제가 1남 8녀인데 외가 쪽 경조사,

아빠 형제가 3남 1녀로 친가 쪽 경조사,


내가 알지도 못하는 친척들의 그 많은 경조사들, 장남인 큰 오빠가 대표로 할 때가 많다. 코로나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줄 알지만 사실 당연하지 않다.

그런 오빠를 보며 나는 절대 장남에게 시집가지 않으리라 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내 남편도 K 장남이다.


우리나라 장남들은 일이 많다.

가족도 잘 챙겨야 하고, 집안 나름이겠지만, 조상에 대한 예도 대체로 장남들이 챙긴다. 부모에 대한 마음도 각별하고, 책임감도 몇 배는 더한 것 같다.


이제 예순의 나이가 넘어가는 우리 큰 오빠,

K 장남의 무게는 좀 내려놓고,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 같은 아들, 딸 우리 같이 나누어 가지자 오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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