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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Sep 22. 2023

또 다른 가족~ 시월드

 또 다른 가족~ 시월드

‘오늘은 우리 둘이 갈 데가 있어.’


해가 지는데 남자친구는 내 손을 꼭 잡고 낯선 버스를 탔다.


‘어딜 가는 거지?’


장난기 많은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이 의아했지만 그냥 따라갔다.

버스가 우릴 내려 준 곳은 부산 외곽 어느 산 아래였다.

그는 말없이 걸음을 재촉하며 산으로 향했다. 한적한 길도 낯설고,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든다.


‘혹시 이 오빠가 흑심이있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나’하는 오만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였다. 그래도 결혼을 하게 되면 이 오빠랑 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잠자코 따라갔다.^^

봉긋봉긋 봉분이 여기저기 솟아 있고, 무언가 숙연한 분위기가 가득했던 늦은 봄의 공동묘지였다.     

 

‘엄마, 내 여자친구예요, 예쁘죠? 엄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었어.’     


머릿속의 오만가지 음탕한 생각이 후드득 봄꽃처럼 바람에 날려갔다. 대신 외롭게 자리 잡은 그의 어머니의 묘를 보자 뵙지도 않았던 분의 짧은 생이 내 맘에 와닿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의 엄마를 처음 소개받은 날이었다.


무덤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묘비 뒷면에 지금 남편의 이름이 첫 줄에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무덤 앞에 색이 바래지 않은 조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삶이 힘들 때마다 가끔 찾아와 본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엄마 무덤가에 앉아 낮 소주를 마셨다. 해지는 노을을 보며 오래도록 그렇게 앉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엄마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쓸쓸했는데 잘 커 줘서 기특한 마음도 들었다. 해지는 산마루에 구름이 걸터앉아 우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던 여러 이유 중에 그날 그렇게 어머니를 소개받은 것도 한 몫했다.  결혼을 위한 가족 간의 상견례는 다양할 테지만 나는 그렇게 시어머니를 만났다. 아들 둘을  잘 키워주시고 쉰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나는 그분을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살아오면서 큰일을 겪을 때마다 늘 곁에서 만났다.    


두 번째 스물다섯에는 더 행복하기 위해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했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양가 부모님이었다. 시댁에는 구순이 넘어가신 시아버지, 친정에는 이십 오 년을 넘게 아픈 친정엄마와 엄마를 돌보시는 아버지가 계신다. 오십의 나이에 부모를 바라보는 마음은 애잔하기만 하다. 마냥 가까이하기에도 힘들고 감히 거리 두기란 말을 하기에도 송구하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행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거리는 존재한다.

     

언젠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20대가 넘어간 자식은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무조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보통은 독립이라고 하면 자식이 부모로부터라고 생각하지만 스님은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생태계에서는 어미가 새끼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노인은 아무리 늙어도 성인이기 때문에 각각 개체보존의 법칙으로 스스로 인생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늙고 병들어 생활이 어려울 때 돌볼 수 있다면 그것은 ‘효’를 행하는 것이며 ‘선’이라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이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뭐라 할 수 없다는 말씀이셨다. 스님의 강연을 들었을 때 처음엔 놀라웠지만, 곱씹을수록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은 행하되, 누군가의 자식이, 또는 며느리가 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상황과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시아버지는 아흔이 넘어선 백발의 할아버지시다. 비타민 영양제외에는 크게 드시는 약도 없이 본인의 건강관리도 잘해오신 분이다. 시댁에 가면 새벽 네 시부터 아버님은 일어나셔서 일과를 시작하신다. 결혼을 갓 했을 때는 같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는데, 새댁이었던 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요즘은 시댁에 가면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내 방식대로 기상하며 또 아버님의 하루는 하루대로 존중해 드린다. 서로 편해진 거리를 찾은 것이다.

     

결혼 초에 시댁 식구들과 광안리에서 가족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장남인지라 우리가 계산을 해야 무언가 아름다운 모임의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당시 남편은 마지막 학위로 정신없었던 학생이었기에 좀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그러나 가족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한 턱 내자는 마음이었고, 이후에 시아버지는 이미 직장생활하면서 돈을 벌고 있던 동생네가 같이 내지 않아 서운하셨던지,


‘우리 집은 다음부터는 무조건 N분의 일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나가서 무엇을 먹던, 집안에 행사가 있으면 시아버님까지 해서 3분의 일이다.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시월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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