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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Sep 27. 2023

외갓집의 그녀들-두 번째 이야기

그 시절 이모들은 진양 하 씨 각종 집안 대소사를 위해 잘 뭉쳤고, 궂은일 좋은 일 마다하지 않고 모이면 뭐든 뚝딱 해결해 내었다. 한 번씩 우리 집에 모여 이모들이 잠도 자지 않고 온갖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시끄러운 수다를 자장가 삼아 듣다가 잠이 든 적도 많았다.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이모들은 ‘근본이 없는 놈’을 데려오면 어쩌냐며 예비사위를 보기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했었다.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자격심사였던 것이다. 늦은 나이까지 공부만 했던 남편이 일대 오의 중년 여성들과의 압박 면접(^^)에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이런 낯선 외갓집 문화를 처음 접한 남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결혼 후 한참 뒤에야 ‘나 그때 식겁했잖아’라며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모는 여섯째인 대전 이모이다. 이모가 많으니 호칭은 자연히 지역을 따라 불렀다. 이모는 큰 덩치만큼 정이 많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다. 장동건을 뺨치는 외모의 이숙이랑 결혼하신 덕분에 젊어서는 속 꽤나 끓이셨지만 내겐 제일 따뜻하고 포근한 이모였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대전에 살면서 이모를 자주 만났다. 애가 애를 낳았다며 이모는 내가 첫아들을 낳았다고 그렇게 좋아하셨다. 이모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가는 날이면 남편은 이모의 통 큰 성격을 잘 알기에 소화제부터 챙겨 먹고 기대 반 염려 반으로 집을 나섰다. 기대는 얼마나 맛있는 음식 일까이고, 염려는 얼마나 많이 먹이실까였다.

갈비를 먹고 있는데도 잡채를 수저에 올려주시며 더 먹이고 싶어 하는 정 많은 우리 대전이모. 이런 이모덕분에 남편은 집에 오면 늘 배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나누고 차가 출발하는데도 기어이 쫓아오셔서 용돈이라며 만원 몇 장을 쥐어주신다.    

  

‘이모 진짜 됐다구요, 김서방도 돈 잘 벌어요. 우리가 용돈 드려야 되는데.’

‘아니야, 어른이 주면 받는 거야. 아기 키우면 돈 많이 들어.’     


기어이 사양하고 차 시동을 거니, 내린 차창 문틈으로 돈을 던져버리시곤 줄행랑을 치셨다. 그렇게 정이 많은 분이시다. 우리 이모는. 우리 집 문턱을 넘는 사람은 절대 빈손, 맨입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요즘 아이들 말로 ‘국룰’이었다.  

   

십 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내가 쉰의 문턱을 넘었고, 그렇게 이모들의 한 세대도 저물어가고 있다. 어릴 적 남해 운암 큰 이모 집을 찾아갈 때면 반겨주던 동네 어귀 큰 당산나무도 사라졌다. 초등학교 시절 이모 집 주변에서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여 온 동네 떠나갈 듯 울면 뛰어나와 맨살을 호호 불어주시며 빨간약을 발라주시던 둘째 이모. 계집애가 따박 따박 말대꾸 많이 한다고 매일 혼내셨지만 맛있는 단감은 젤 먼저 따주시던 넷째 죽전이모. 사랑하는 나의 이모들은 한 분 두 분 병환으로 멀리 하늘 소풍을 떠나셨다. 내 곁에 그들은 이제 없지만, 내 유년 시절의 기억과 함께 아직도 젊고 예쁜 이모들로 남아있다.     


가부장적이며 남아선호사상이 굳건한 외가에서 궂은일은 이모들이 모두 앞장섰다. 반면에 외할머니의 비호 아래, 외삼촌은 편하고 고운 꽃길만을 걸으며 공부만 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믿던 시대였기에, 외갓집 똑똑한 암탉들의 배움의 기회는 외삼촌에게 몰아주기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다. 외삼촌은 기어이 박사까지 되어 시골에서 할머니의 자랑이 되었다. 이모들이 외할머니로부터  외삼촌만큼의 기회와 지원을 받았더라면......


외사촌 형제 서열상 37번째였던 나로서는 높으신 외삼촌을 독대할 기회가 없어 외삼촌과의 기억은 거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1남 8녀의 외아들로 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삼촌은 외할머니가 99세 연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으며, 최선을 다하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겐 외삼촌보다는 이모들의 파워가 훨씬 대단해 보였고, 멋있었으며, 그녀들과 함께라면 인생에 무슨 일이라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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