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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Oct 02. 2023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매일 오던 전화, 매일 듣던 잔소리, 이런 것들이 갑자기 음소거되듯, 어느 날 세상이 멈추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화면이었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번개와 천둥이 치던 날.


 누구의 뒷담화를 해도, 무슨 불평을 해도 영원한 내 편이었던 친구 같은, 언니 같은 엄마는 사라졌다. 대신 끊임없이 돌보아주어야 할 아기 같은 엄마가 내게 돌아왔다.   

   

건강을 과신하며 평소 병원 한 번 안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머리가 계속 아픈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타이레놀 먹으면 낫겠거니 하면서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당뇨와 스트레스가 겹쳐 엄마는 쓰러졌다. 뇌출혈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러하듯 엄마에게 다섯 형제는 당신이 가진 전부였고 오직 자식만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희생하며 살아오셨다. 90년대 말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IMF로 막 사업을 시작했던 큰 오빠에게도 예외 없이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다. 엄마 인생의 큰 버팀목이었던 장남의 부도는 엄마에게 큰 충격이었으리라. 그러던 중 넷째인 내가 결혼을 하였다. 아들을 낳았을 때 딸 몸조리는 직접 해 주시겠다며 엄마는 고집을 피우셨다. 대전까지 오셔서 며칠 밤을 잠도 못 주무시고 갓난쟁이를 돌봐 주셨다.     


  며칠 후 쓰러진 엄마를 부산병원에서 만났을 때는 이미 반신불수에 언어장애까지 겹쳐 예전의 씩씩한 엄마가 아니었다. 잔소리가 그렇게 많았던 우리 엄마가 입술 달싹거리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이런 일이 왜 하필 엄마한테 일어난 건가 싶어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 없어 엄마를 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산후조리 후에 쓰러지셔서 내 탓인 것만 같은 죄책감도 컸었다.      


  몸은 장애가 왔지만, 엄마의 정신만큼은 예전처럼 또렷해서 눈빛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부지런한 분이라 끊임없이 움직이셨는데 머리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얼마나 갑갑하셨겠는가.

     

‘무 ㄹ 기 ㅁ 치, 내 ㅇ자ㅇ고.’  

   

  엄마가 막내 사위 손을 힘없이 잡고는 손바닥에 두 단어를 쓰셨다.

냉장고에서 물김치도 같이 꺼내 먹으라는 뜻이다. 본인 몸도 성치 않은데 굳이 사위를 챙기려는 마음이 답답하다. 누워서도 눈을 껌벅거리며 이것저것 끊임없이 지시하시고 손가락으로 시키셨다. 이러니 아버지의 일은 두 배가 된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엄마에게 익숙해질수록 낯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어진 엄마, 아버지의 24시간 밀착케어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틈나는 대로 친정을 방문해야 했다.

 

때로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있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궁금했다. 목련꽃을 좋아하셨는데, 어느 이른 봄, 후두둑 떨어져 버라는 창문 밖 목련잎을 보며 엄마의 눈물이 또르륵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슬펐던 것이다. 변해 버린 자신의 상황이 엄마도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거겠지.      


엄마는 이상하게도 요양원을 싫어하셨다. 전문간호사가 있고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곳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늘 집에서 지내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그러나 잘 견디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전립선암으로 입원을 하게 되면서, 엄마는 요양원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다.     


‘내가 수술받고 치료하고 나면 우리 하여사 데리러 금방 올 테니 잠시만 가 있는 거야.’    


아버지가 병원으로 떠나시기 전, 엄마의 손을 잡고 아이에게 하듯 당부를 하셨다.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드리는 날. 들어가는 진입로부터 정문까지 엄마가 좋아하는 목련이 줄지어 피어있었다.  

    

‘엄마가 외롭진 않겠다. 목련꽃을 보며 아빠를 기다릴 수 있겠네, 다행이다.’     

 

좋은 생각만 하려고 애썼다. 엄마가 잘 견디게 그 봄 내내 목련이 오래오래 견디기를 바랐다. 요양원은 생각한 것보다 평화롭지 않았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현상들이 해결되지 않아 사투를 벌이는 분들이 많았다.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 칠구육십삼.’  

   

‘저 할머니는 왜 구구단을 저리 외고 다니시는 거예요?’    

 

옆에 계신 요양사분에게 여쭤보았다.    


‘치매 걸리신 분인데, 본인이 치매 걸린지도 모르고 아 글씨 저러고 다닌다 아입니까. 구구단 외고 있으면 자식들이 빨리 데리러 온다꼬 이야기를 하고 가논께, 딱 믿고 있는 거 같은데, 아이고 매일을 저러고 있다우.’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살기 위해 바쁘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대로, 아픈 사람은 아픈 대로. 엄마를 요양원에 두고 오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병실 창너머로 휠체어에 앉아 엄마는 그렇게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창가에 머물러 계셨다.      


아버지가 퇴원하실 때까지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며 주말마다 요양원을 방문하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가까운 곳으로 바람도 쐬었다. 전국에 계셨던 이모들도 엄마를 보러 가끔은 와 주셨다. 물리적 거리가 꽤 되었는데도 ‘가족’이라는 무서운 조직의 단합된 모습을 이모들은 보여주셨다.      


다행히 전이가 없었기에 아버지는 종양 제거만 하시고 몇 주만에 엄마를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리 ㅂ 스 티ㄱ’

    

내 손을 잡고 엄마가 힘없이 손가락으로 부탁하셨다.


‘그래 아빠 오시니까 예쁘게 하고 있자, 엄마 립스틱, 여기 입술 내밀어봐요.’


살아 있어서 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감사했다. 암 수술 잘하고 돌아오는 남편이 있어, 그 남편을 기다릴 수 있는 아픈 엄마가,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립스틱을 찾는 엄마가 감사했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도착하니 환자분들이 수군대었다.    

 

‘아이고, 잘 생겼구먼, 저리 잘 생긴 신랑이 와, 각시를 요양원에 맡겨놨을꼬, 하이고 무신 사연이 있는갑다.’     


요양원이 다 조용할 것이라고 상상하면 절대 안 된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했다. 엄마는 주변의 수군거림이 싫지는 않은 듯 퇴소 준비를 하며 아버지 손을 잡으셨다.   

  

‘모두 아 안 녀 엉~.’     


엄마는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요양원을 떠나왔다. 목련은 이미 약한 잎을 모두 떨구었고, 개나리며 진달래가 천지로 피어 엄마의 퇴소에 미소를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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