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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Oct 04. 2023

아버지와 초코파이

 

'情'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오리온제과의 '정(情)' 초코파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은 사랑을 넘어서는 무언가 애틋함. 애잔하면서도 그리운 그런 마음, 쓰다듬어 주고 싶고 가끔은 쓸쓸함이 묻어나는 마음.   

  

 아버지는 퇴근길에 항상 12개들이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 오셨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 오빠는 엄마의 지극한 공부 열정에 이미 부산으로 유학을 가 있었고, 남해집에는 작은 오빠, 언니, 나 그리고 막내 남동생이 남아있었다. 초코파이가 12개니까 세 개씩 나누었다. 


이 음식을 먹는 걸 봐도 성격이 나온다. 맛있는 걸 먼저 다 먹어 치우는 사람도 있고, 두고두고 아껴 먹는 사람도 있다. 자기 것을 다 먹어치우고 남의 것을 탐하는 이도 있다. 나는 두 번째다. 


책상 서랍에 달디 단 초코파이를 아껴 먹으려고 숨겨 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이면 귀신같이 이 초코파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심증적 범인은 알고 있었으나 결정적 증거를 잡지 못해 나는 늘 울고 마는 피해자였다.   

           

‘내 초코파이, 엉엉, 여기 놔뒀는데, 엉엉.’   

           

전 재산을 잃은 듯 울어 제치는 작은 딸을 안고 천장까지 들어 올리며, 

    

‘아이고, 우리 딸, 저녁에 아빠가 더 사 올게, 울지 마 울지 마.’     

 

라고 약속하고는 기어이 눈물을 멈추게 해 주시던 분.    

     

지금이야 시험성적으로 줄 세우는 것보다 적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체험학습이 많지만, 우리가 어릴 때는 초등학교 때부터 매월 배운 걸 시험 치는 월말고사에 학기말고사까지 있었다. 90점 이상이면 학력 우수상을 주고, 왼쪽 가슴 명찰 위에 노란 별을 달고 다녔다. 아버지는 나의 노란 별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해 주셨다. 어린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내 공부의 동기부여였다.


설령 성적이 떨어져도   

        

'니 뒤로 수두룩하게 줄 서 있구만, 그까짓 성적이 뭐 대수라고. 세상 안 끝난다, 괜찮다 괜찮아.',  

      

 내 자존감의 대부분은 유년 시절 아버지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볼을 부비면 하루 새 자란 아버지의 구레나룻 수염이 어린 내 뺨에 따끔거렸다. 나는 성인남자라면 당연 이 구레나룻이 있는 줄 알았다.

          

'담에 나는 꼭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할 거야.'


다짐을 했고, 이후 대학생이 된 후에도 나는 이성을 만나면 희한하게도 구레나룻이 있는지 없는지 힐끗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남편도 아버지처럼 구레나룻이 있네. 하지만 그 멋은 아버지만큼 못 따라가는 듯하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는데 집안 형편으로는 남해에 있는 여고를 가야 했다. 하지만 성적도 되는데 왜 친구들 다 가는 진주로 진학을 못하게 하는지 엄마를 상대로 고집 센 나는 단식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단식이 만만하지 않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하루가 지나니 슬슬 후회가 되었다.


 아~ 괜히 안 먹는다고 해서 이젠 타이밍도 놓쳐서 밥을 먹기도 애매해졌다. 그때 창문너머로 아버지가 똑똑 두드리시며 내민 비닐봉지에 선명한 글자, '낙원제과'.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밤과자와 찹쌀떡이 있었다. 지금에야 흔하디 흔한 양과 지만, 그때는 특별한 날에나 먹던 귀한 음식이었다. 

     

'먹어가면서 해, 먹어야 싸울 힘이 나지.'

      

아버지는 내가 민망할까 봐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셨다. 그 시절 나를 응원해 주던 유일한 분이셨다. 찹쌀떡을 먹고 입가에 흰 가루를 묻힌 채 나의 단식은 계속 되었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나는 진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다.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면 참 철없는 투쟁이었는데, 


아버지의 '무조건 나는 니편' 이라는 든든한 빽으로 나는 험한 세상에서도 씩씩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빠들에게는 참 엄하셨는데, 딸 둘에게는 한 없이 자상하셨다. 어린 시절 나는 


'만약에 엄마랑 아빠랑 싸워서 이혼하면 나는 당연히 아빠랑 살 거야.’


라고 철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엄마한테 혼이 나서 등짝이라도 맞을라치면 아버지한테 젤 먼저 도망갔었고, 아버지는 그렇게 어린 나에게 안전한 피난처였고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구원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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