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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Oct 06. 2023

아름다운 동행

제9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우수작, '일상 속의 장애인'

그림: 일러스트레이터 노콩



 ‘반갑습니다, 고객님.     

  고객님의 소중한 상품이 오늘 배송되었습니다.’   

       

  물건을 주문한 적도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자를 확인한다. 발신인을 보니 남해 친정아버지이다. 며칠 뒤가 막내 사위의 생일인 것을 기억하고, 남해에서 당일 배송으로 택배를 손수 부치신 것이다.


스티로폼 택배 상자를 뜯으니 남해 냄새 가득 품은 반건조 박대가 몇 마리 누워있고, 생일상에 올리라고 잘 손질된 조기도 보인다.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한다.     

 

  아버지가 친정엄마처럼 우리를 챙기기 시작한 건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진 그때부터였다.       


엄마의 병은 친정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진 엄마. 자존심이 강한 분이라 자기 대·소변을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아버지만 찾았다.


무엇보다 힘든 건 엄마의 목욕이었는데 이마저도 아버지만 하라고 해서 24시간 아버지의 밀착 케어가 시작되었다.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어눌한 엄마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이고 우리 하여사는 아이들 키울 때는 내는 맨날 뒷전이더마는 요새 와서 인자 철들었는가베, 내만 찾는 거 본께, 허허”      


  아버지의 실없는 유머에 엄마의 입술이 어색하게 샐쭉 올라간다. 남들이 보면 지옥 같은 상황일 수도 있는데 매사에 긍정적인 아버지의 대처로 엄마는 웃는 날이 조금씩 더해갔다.      


  가까이 사는 언니는 낮이고 밤이고 일만 생기면 불려 가면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언니는 다섯 형제의 장남이 되어갔다. 우리는 가족회의를 통해 각자의 상황에서 엄마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나누었다.


많이 돕지 못해 서로 미안해했다. 아버지의 수고를 들어드리고자 일주일마다 순번을 정해 매주 남해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가 다섯 형제라 오 주 만에 한번 순서가 돌아오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엄마가 이런 날을 대비해서 자식을 많이 낳았네 라며 가벼운 농담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건 아닌 듯하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이십 년의 세월을 훌쩍 넘기니, 형제간이라도 왜 서운한 감정이 없겠는가.


가까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언니는 온갖 일을 맡아해야 되었고, 아들이라는 이유로 오빠와 남동생도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서운한 말들이 오고 갈 때면 우리에겐 관계의 거리조절이 필요했고 서로를 이해할 사랑의 마음이 더 필요했다.

  

  엄마가 장애인 판정을 받지 않았으면 몰랐을 텐데 나라에서 장애인 등급판정에 따른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도움을 받게 되었다. 개인의 아픔이 국가의 시스템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매일 집으로 오시는 장애인 돌봄 서비스의 도우미 이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객지에서 한 번씩 와보는 저희보다 매일 돌보아주시는 이모님이 자식보다 훨씬 낫네요.”,      


  “아유, 그런 말씀 마세요. 자식들이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내니까 이런 서비스를 받는 거예요.”


 하며 위로의 말씀을 건네주셨다.      

  지난 주말에는 오른팔 오른 다리를 못 쓰시는 엄마를 위해 매주 무료 진료 봉사를 나오시던 보건소 소속 한의사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진료를 하러 가게 되었다며 인사를 오셨다. 남해에 계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주셔서 우리가 감사한데 그동안 정들었다며 일을 마치고 직접 아버지 엄마께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 건강하셔야 합니다. 다음에 오시는 한의사 선생님은 더 훌륭하시니 침 잘 맞으시고 꼭 치료 잘 받으셔야 해요.”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엄마는 큰 눈에 눈물이 고이며 진심으로 감사해하며 젊은 한의사 손을 놓지 못하셨다. 우리 가족만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장애인인 엄마를 돕고 있었다.

     

  엄마의 장애에 모두가 익숙해져 가던 어느 해, 아버지의 건강도 눈에 띄게 약해져 가고 있었다. 몇 년을 휴가 없이 엄마 옆에서 돌보기만 하셨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가족회의 끝에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우리 형제가 일주일을 엄마와 지내고 아버지께 온전한 쉼을 드리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버지는 긴 병간호로 친구분들과의 모임도, 사회생활도 점점 단절된 노년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 후 바로 군에 입대했었는데, 휴가 이야기가 나오니 그때 군 생활을 보낸 강원도 화천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 2박 3일 일정의 특별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왠지 우리 오 남매도 같이 기대하며 아버지의 휴가를 준비하였다. 막내 사위가 운전하고 작은아들이 동행한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청춘의 시절로 돌아갔다 오신 듯 이후 아버지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아버지가 엄마와 장애를 함께 한 지 25년째이다. 여전히 새벽부터 변함없는 하루를 엄마와 같이 일어나 시작한다.     


  “우리 하여사, 세수하고, 자 이제 로션 챱챱 바르고, 아이고 예쁘네.”     


  엄마 재활운동을 시키느라 아버지는 책도 찾아보시고 평생학습원에서 재활 과정 공부도 수강하셔서 반은 의사가 되었다며 자랑하신다. 다섯 형제들도 이제 오십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자식들의 생일을 챙기신다. 남해 생선만큼 맛있는 게 없다며 손수 택배를 보내주신다.      


지난 남해군 체육대회에서 아버지와 엄마는 ‘아름다운 동행상’이라는 큰 상을 선물 받았다. 그저 할 일을 했는데 이게 상 받을 일이냐며 여든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가 멋쩍게 웃으셨다.      


  볕 좋은 오후가 되면 휠체어에 모자까지 씌운 엄마를 태우고 아버지는 동네 놀이터 정자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러 간다. 엄마의 휠체어를 밀고 가는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듬직하다. 아버지가 걸음을 떼실 때마다 얼핏 얼핏 보이는 엄마의 꽃무늬 모자가 예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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