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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Oct 13. 2023

곱게 늙자

결혼을 하면 시댁이라던지, 처가와 같이 덤으로 따라오는 새로운 인간관계들이 있다. 배우자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결혼을 했으니 대체로 부부 동반 모임일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성격상 굳이 별로 가고 싶지 않고, 섞이고 싶지 않아 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부부동반이라는데 남편 혼자 보내기도 뭐해서 같이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남편에게도 남자들의 인맥이라는 게 중요하니 이런저런 모임들이 있다. 그중에서 고등학교 친구 모임은 연애할 때 한 두 번, 결혼하고 가끔 같이 놀러 다녔다. 그때는 아이들이 없으니 약간 더블데이트 같은 느낌이랄까. 아이가 태어나니 계절마다 놀러 다니며 한 두 번, 이러다 보니 일 년에 몇 번은 만나게 되는 모임이다.


게다가 아이를 같은 해에 낳았다면 이야깃거리가 많아 더 자주 보게 된다. 육아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고, 부부끼리 만나니 당연히 가족, 가정사가 이야깃거리가 되고, 남편을 통해 만나는 자리이다 보니 적절한 예의가 버무려져 긴장감도 있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3. 남편의 절친, H와 Y     


몇 년 전 이사를 할 때, 짐을 챙기는데 오랜 박스에서 군사우편 소인의 봉투가 툭 떨어진다. 발신인을 보니 H이다. 대학시절 남편의 학교로 보낸 게다가 정성껏 손으로 눌러쓴 군인 아저씨 H의 편지였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손 편지로 소식을 전할 때였다.


군인아저씨가 훈련으로 힘들텐데, 객지에서 공부할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이 살뜰했다. 새마을 운동 시대를 살아온 세대답게 편지에는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해야 한다는 헝그리 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었다. 온통 열심히 공부해라, 열심히 살아라, 뭐 그런 엄마 같은 마음이 그득했다. 오래된 절친만이 해줄 수 있는 그런 H의 따스한 마음들이 느껴졌다.     


남편은 호불호가 강한 편이고 상식에 벗어나는 일은 용서가 잘 안 되는 타입이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무척 싫어하고 마찬가지로 누군가 나에게 선을 넘는 행위도 용납이 안 되는 형이다. 이런 성격 탓인지 남편의 절친들을 보면 대부분 순하고 착하다. 대체로 남편을 받아주고 보듬어준달까. H도 그렇게 순한 사람이다.


H는 부산 남자인데 서울 여자랑 결혼을 하였다. 누가 그랬다. 서울여자는 깍쟁이라고. 그러나 나는 그런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프레임인지 깨닫게 되었다. 큰 애가 갓난쟁이일 때 온가족이 몇년간 미국에서 살게 되었다. 외국 나가서 살 일도 막막한데 이민 가방 네 개에 갓난아이까지. 지금이야 다들 호텔이나 민박집을 이용하지만 예전에는 서울에 누가 산다고 하면 모두 먼 친척이라도 그 집 가서 베개며 이불 다 꺼내놓고, 먹고 자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친척도 아닌데 H 아내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내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미국에 가기 전 아주 따뜻하게 하룻밤을 보낸 기억이 있다. 모두 H 와이프의 배려 덕분이었다.  


큰 애 나이가 같으니 미국에 있는 나에게 한글카드며 이런저런 육아용품들까지 보내주었다. 가끔 우리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남편들보다 더 살뜰한 관계가 되어갔다. 큰 아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게임에 빠져 공부를 안 하기도 하고, 사춘기도 비슷하게 겪었다. 심지어 군대도 비슷하게 가서 우리는 육아의 많은 부분에서 동지 같은 사이가 되어갔다. 아들이나 딸의 학교 엄마들 모임에서는 나눌 수 없는 육아의 고충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었다.  


‘와, 이 놈들 대학 가면 이제 노후준비 좀 하려고 했거든. 근데 이제 돈이 나가는 단위가 달라졌어. 학원도 안 다니는데, 대학생이 돼도 돈이 줄줄 새네.’


‘맞아, 이 쉑키들 돈 먹는 하마들이야.’


H의 말에 남편이 맞장구친다.  

    

이제 두 아이들이 자라 대학생들이 되고 나니 H 네 부부와 우리는 같이 여행도 다니고 주말이면 술도 한 잔씩 한다. 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하는 현실적인 노후준비의 이야기들을 한다. 같이 늙어가는 것이다. 오십견이 온 것 같다는 둥, 탈모가 진행 중이다라는 둥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건강에 관련된 것이지만 말이다. H네 부부와의 만남은 늘 생활 속에 쉼이 되고, 지친 일상에 작은 위로가 된다.      


반면, 우리 부부와 나이가 비슷하기도 한 남편의 대학동기인 Y부부와의 만남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애들도 비슷한 나이고 환경도 비슷하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 서로의 처지도 잘 아는 그런 친구이다. 언젠가 Y의 아내가 전화가 와 둘이 커피를 마신 적이 있었다. 둘째 녀석이 뇌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했고 다행히 경과가 좋지만 입시 준비 중이라 걱정된다고 했다. 같이 아이를 키우니 안쓰럽기도 하고,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일이 생겨 얼마나 힘들까 하는 마음에 같이 기도하겠노라 힘내라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Y의 아내가 굳이 힘든 이야기를 나에게 한 이유는 아픔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었던 것 같다.


나에게 전해 들은 남편도 Y가 그런 내색이 없었는데 힘들었겠네 하고 넘어갔었다. 잊고 지내던 중, 남편에게 걸려온 갑작스러운 Y의 전화. 부인에게 들었는데, 둘째 녀석 이야기는 다른 데 가서 절대 전하지 말라고 했단다. 부인과는 달리 Y는 무언가 불편했나보다. 남편도 뭐 좋은 일이 아니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다시 한 번 더 전화가 와서 절대 이 이야기를 옮기면 안 된다 여러 번 단도리를 시켰다고 했다.


좋은 일이 아니니 그러겠거니 했지만 남편은 Y가 두번 세번 주의를 시키니, 그런 행동이 처음엔 의아했다가 인생사 많은 일들이 있지 하며 이해하려고 했단다. 그러다가 문득, 친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아픔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밖에 안보나 싶어 서운했단다. 물론 아들은 지금 아주 건강하게 학교에 잘 다니고 있어 다행이다.


좋은 일은 늘 내세워 같이 공유하면서도, 본인의 아픔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려니 생각하고 잊고 있었는데 두 번씩이나 전화를 해서 오히려 리마인드 시켜주니 어이가 없다는 남편. 친구 Y가 여러면에서 예민한 상황이 많다보니, 나보다는 남편이 Y부부와의 만남은 불편해한다. 30년 넘게 만나온 관계가 무색하다.

     

사실 어느 모임이 다 그러하듯, 부부동반 모임도 장. 단점이 있다. 어떤 부부는 모임만 다녀오면 싸운다고 했다. 경제적 차이가 어느 정도 나면 부인이 드는 가방이며, 남편의 월급 같은 재정상태를 비교하게 된다. 비교당하는 모임에 왜 굳이 가고 싶겠는가. 그 집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어느 대학을 갔다는 둥. 누구는 자랑을 하고 누구는 비교당한다. 그래서 부부동반모임은 안 가는 아내들, 남편들도 많다.


누구의 삶의 방식이 옳고 그름은 없다. 다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만 이제는 편하게 살고 싶을 뿐. 나와 맞는 사람, 결이 비슷한 사람 만나 서로 이해하고 즐거우면 그만이다.     


Mirror Therapy 거울치료 : 팔이나 다리 등 한쪽 부위가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을 때, 팔, 다리 사이에 거울을 비추어 마비된 쪽 팔이 움직이는 것처럼 뇌가 인식하고 자극을 받게 하는 의학적 치료법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도 '나 오늘 거울치료 했잖아' 이런 표현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자신이 했던 일을 타인이 하는 것을 봄으로써 자신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잘못을 깨닫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거울치료’라고 부른다.


가끔은 내가 속해있는 모임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하여 내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 속에서 가끔은 의도치 않지만 이렇게 거울치료를 하게 되고 객관화된 나를 만날 수 있다. 요즘들어 하는 다짐. 곱게 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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