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얼른 가서 저기 앉아.'
복잡한 지하철에서 남편이 핑크색 임산부배려석 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이고, 내가 임산부도 아닌데 저기 왜 앉아~, 괜찮아.'
아내를 편히 가게 하고 싶은 남편의 마음은 기특하나 나는 가끔 당황스럽다.
이것은 배려인가 오바인가.
딸이랑 언젠가 백화점 가는 길에 지하철을 탔는데,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아주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이 꽉 차 있는데 임산부 배려석은 비어있었다.
모두들 민주시민으로서 임산부를 배려하기 위해 핑크색 자리를 비워 두었다. 그러나 우리의 임산부들은 이 시간에 잘 나오질 않는다. 사람들 무리에 밀려 어느새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게 되었다.
딸이 내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엄마, 지난번에 누가 봐도 아줌마였거든, 근데 타자마자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시는 거야. 근데 우리 엄마는 그런 아줌마가 아니라 다행이야.'
들으면서 뜨끔했다.
'피곤했었나 보네, 그 아줌마.'
며칠 전에 아빠가 엄마 저기 앉으라고 밀었던 거를 이야기해 줄까 말까 하다가 그만뒀다.
지하철에 사람들이 아주 많고 마침 임산부도 없는데, 굳이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배려인지 의문이 든다. 임산부가 있으면 당연히 배려하여 그들이 앉아야겠지만. 다리가 아프거나 몸이 불편한 누군가가 앉으면 발 디딜 틈 없이 서있는 사람들도 더 편해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임산부도 아니면서 굳이 거길 앉으시나요 라는 주위의 시선도 따갑고 이럴 때는 어떤 모습이 진정한 배려이고 에티켓인지 묻고 싶어 진다.
연말이라 모임이 있어 늦은 시간 귀가를 하며 수인분당선을 탈 일이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지하철에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는 임산부가 있었다. 오호, 나로서는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그 자리가 주인을 찾은 듯, 꽉 차 보였다.
지하철에서 배가 볼록한 임산부가 앉은 모습을 처음 본 터라 신기했었다. 파마머리의 임산부는 피곤했는지 졸고 있었다.
내리기 위해 출입구 문쪽으로 가다가 가까이서 본 임산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뽀글 머리를 하고 배가 볼록한 그분은
.
.
술이 취해서 자고 있는 볼 빨간 아저씨였다.
핑크빛 엄마 품에 안긴 듯 고요히 잠든 아저씨가 내릴 역은 놓치지 않고 잘 들어가시길.
임산부석에 앉은 용감한 볼 빨간 아저씨,
올 한 해도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