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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  국제 소송

추석 연휴 전날. 신나라 상무가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공장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상무님! 영어로 장문의 팩스가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소송 서류 같은데요”

“뭐? 소송? 어디서 온 건데?”

“홍콩 법원이요”

“홍콩에서? 일단 나한테 보내게”   

  

수 십장의 팩스가 수신되고 있다. 

얼핏 보니 홍콩의 에이전트인 필립에게서 온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회사가 그를 통해 수주한 중국 광저우시 국제 전시장 지붕 공사의 중개수수료를 지급하라는 소송이었다. 공사가 다 끝났는데도 회사는 잔금을 못 받은 상태였고, 그래서 그에게 잔금을 받아 내도록 독촉하고 있었고 진금이 들어오면 그에게 수수료를 지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잔금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당시 중국 공사를 한 경우 마지막 잔금을 못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회사를 상대로 덜커덕 소송을 제기해온 것이다.    

 

소송 서류를 다 읽고 난 신나리 상무는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송가액이 무려 백만 불이다. 액수도 액수지만 그렇게 믿었던 파트너였기에 배신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신상무와 그는 동년배로 비슷한 시대를 살았기에 왠지 모르게 그에게 정이 갔고 또 그가 막 창업했던 때인지라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를 에이전트로 선택했다. 또 그가 한국에 올 때면 신 상무가 그를 자신의 집에 초청해서 접대를 하곤 했다.  

    

그는 분한 마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내일부터 시작되는 추석 연휴가 일주일이나 되는데. 다른 때 같으면 해외 영업부 직원들 불러 모아서 회의 소집하고 소주잔 기울이면서 분풀이를 했을 텐데...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분노를 삭였다. 서류 뭉치를 가방에 쑤셔 넣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2시간 동안 열심히 운동하고 샤워 후 차를 몰고 집에 가는데 차창으로 맞는 가을바람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불과 2시간 전에 그의 마음은 갈 곳을 잃었었는데 2시간 뒤 기분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청명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그는 어떤 시나리오를 세워야 할지 그림을 그렸다.

      

집에 도착 후 저녁 식사를 하고 서류를 샅샅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2주 안에 변호사를 선임해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것도 국내 변호사가 아닌 홍콩 변호사를 통해.  

    

역시 필립은 교활한 친구다. 이 친구는 한국 시장을 너무나 잘 안다. 소송 서류를 추석 연휴 직전에, 그것도 신 상무가 근무하는 본사를 피해 공장으로 보내 시간 벌기를 하려 한 것이다. 아마도 추석 지나 그의 손에 도착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우왕좌왕하다가 회사가 제때 응소 못하거나 잘못된 전략을 세우게 하려고 했겠지.   

   

추석 긴 연휴 동안 그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짰다. 국내에 있는 국제 변호사를 수소문해 일단 연락을 취하고 추석 이후에 만나 홍콩에 있는 변호사를 다시 선임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그는 추석 연휴 동안 오로지 소송 준비에만 집중했다. 계약서, 그와 필립 사이에 오고 간 팩스, e메일 등 수 천장의 서류를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날짜별로 일목요연하게 다 정리했다. 추석 연휴 끝나자마자 그는 변호사를 만나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이후 1년 동안 변호사와 함께 홍콩을 오가며 소송을 진행했다. 결과는 회사의 완승이었다. 변호사를 두 명이나 선임하고 외국에서 진행하는 소송이다 보니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갔지만 승소하게 되니 신 상무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위기를 맞는다. 위기는 불편하고 불쾌하다. 그때 대부분은 화풀이를 하거나 신세 한탄하거나 술을 마시는 등 잘못된 대응을 하는 수가 많다. 위기일수록 더 냉철해져야 한다. 위기의 순간에 어떤 전략을 세우고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지 차이다. 시나리오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다.     


후일담이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필립이 신 상무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재판이 그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다음이다. 그는 신 상무의 집 주소도 알고 있다며 재판에서 지면 자신과 가족까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를 협박하기까지 했다. 신 상무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짜식, 홍콩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지가 무슨 유덕화야, 주윤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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