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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살아가다 보면 삶이 순탄치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상황이 펼쳐질 때가 있다. 내 선택이 잘못된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고,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원치 않는 환경에 내몰릴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한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지금의 상황을 만든 사람  또는 사건을 원망한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 (또는 대상)에게 화풀이를 한다.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아니 더 나빠질 뿐이다. 많은 경우 부정적 환경에서 부정적 의사 결정과 행동을 했을 때 상황이 호전되는 경우는 없다. 



내가 직장 생활할 때 일이다.

나는 첫 직장을 대기업에서 시작해 4년간 경력을 쌓은 후 중소기업으로 이직하여 24년을 다녔다. 내가 이직한다고 하자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굴지의 대기업에서 이름도 못 들어본 중소기업으로 옮긴다니까 아내가 “결혼하기 전에 옮기지, 그러면 결혼 안 했을 텐데, 결혼하자마자 옮기는 게 어딨냐. 이거 사기 결혼이다” 어쩌다 하며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아니, 이 여자가 나를 좋아한 거야, 대기업을 좋아한 거야?’ 어쨌거나 나는 회사를 옮겼고 회사 옮긴 다음에 정말 죽기 살기로 일했다. 그때는 일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당시는 토요일도 근무할 때였는데 이직 후 3년 동안 일요일 쉬어본 기억이 6개월도 안 된다. 회사는 매년 50% 이상 성장했다. 3년마다 따박따박 승진하고, 3년마다 차 바꾸고, 5년마다 큰 집으로 이사 갔던 것 같다. 입사 10년 만에 부장이 됐다. 내 인생에 꽃길만 열리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S대 나온, 대기업 출신의 임원이 낙하산을 타고 내 직속 상사로 날아왔다. 그때의 내 심정은 참담했다. ‘내가 이 회사를 위해 어떻게 일했는데…’ 사장도 S대 출신이라 후배라고 중책을 맡기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일하는 스타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경리 출신이라 그런지 하루 종일 계산기만 두드렸다.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가 없는 직원과의 면담에서도 그는 습관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일종의 '틱’인 듯했다. 그는 한 두 장이면 될 보고서를 여러 장으로 늘리는데 천재였다. 그가 온 이후 직원들의 보고서 작성 시간이 서너 배로 늘었다. 한마디로 비생산적, 비효율적이었다. 그리고 부하 직원이 결재 서류를 올리면 며칠씩 깔고 뭉갰다. 도대체 의사 결정을 하는 게 없었다. 그러다 막판에 사인해서 패스하는 게 루틴이었다. 중소기업의 장점이 신속한 의사결정과 집행인데 그로 인해 업무 추진 속도가 훨씬 느려졌다. 


사사건건 나와 부딪쳤다. 나는 그에게  여러 차례 개선을, 아니 개악(改惡)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그는 부하 직원인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을 괘씸해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도 않는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러다 결국은 그와의 파워 게임에서 밀려서 내가 좌천되는 아픔을 겪는다. 회사는 총무부장 하던 나한테 대전 영업소장 발령을 냈다. 나한테 영업을 하라고..? 황당한 건 내가 엔지니어도 아니고, 영업을 하던 사람도 아니고, 대전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닌 완전 '3무' 발령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인가 미팅하러 대전 한 번 가 본 기억밖에 없는데…


‘아니, 어떻게 회사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거 나가라는 얘긴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홧김에 '확, 회사를 때려치울까?' 하는 마음도 여러 번 들었다. 이건 '대응적 반응'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이게 내게 또 하나의 기회일 수 있겠다. 제대로 한 번 해 보자'라고 마음먹었다. 결심이 서자 아내한테 같이 내려가자고 했다. 이번에도 아내가 펄쩍 뛰었다. “내가 왜 그런 시골구석을 가냐. 가려면 당신 혼자 가라. 난 죽어도 못 간다.” 그래서 내가 “당신 같이 안 가면 내가 마음을 못 잡아서 서울 왔다 갔다 하면 제대로 일 못 한다.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당신이 도와 달라”하고 부탁했지만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사흘을 설득했지만 도저히 설득이 안 되자 막판에는 내가 협박을 했다. “당신 같이 안 가면 나 혼자 내려가서 셋이 올라올 수도 있다. 그때 나한테 뭐라 그러지 마라.” 그랬더니 아내가 울면서 따라 내려왔다.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이사까지 하니 본사 경영진도 깜짝 놀랐다. 이른바 배수진을 친 것이다. ‘주도적 반응’을 한 것이다. 그때 대전에 행정수도가 생길 때였기 때문에 일도 많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3무 지역에 처음 내려간 사람이 9개월 만에 목표 달성 다 해버렸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내게 본사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란다. “아니, 발령난지 열 달만에 무슨 또 인사발령이냐. 이제 좀 할 만한데... 나 못 간다” 하고 항명을 했다. 결국은 6개월 버티다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아내는 이번에는 또 서울 안 간다고 떼를 썼다. “대전 이렇게 살기 좋은데 왜 또 서울 가야 하냐”라고... 참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아내는 나한테 이해 안 된다고 할 때가 더 많지만...)


새로운 환경이 주어질 때 두려울 수 있다. 더군다나 상황에 떠밀려서 원치 않는 환경에 처할 때 싫고 두려울 수 있다. 지식도, 경험도, 준비도 안 돼 있으니 두려운 게 당연한 거다. 그런데 나 스스로 좌천 발령 낼 수 있는가? 그런 사람은 없다. 나는 밀려서 좌천됐지만, 새로운 환경에 배수진을 치고 한 번 해보자 하니까 새로운 길이 열리더라. 어떤 환경이 주어지던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일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결국은 환경과 여건이 아니라,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일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결과적으로 나는 금의환향했고 그 임원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다. 나는 서울로 올라와 영업본부장을 맡았다. 영업의 ‘ㅇ’자도 모르던 사람이 불과 1년 반 만에 영업人으로 우뚝 선 것이다. 만약 그때 그가 낙하산으로 들어오지 않고 내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또 그와 계속 근무를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는 교만과 무사안일주의로 살아갔거나 그와의 갈등을 못 이기고 내가 먼저 퇴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 길게 보자. 꽃길이 열리나 보다고 생각할 때 가시밭길이 펼쳐지기도 하고, 위기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기회일 수도 있다.



국가대표 가정행복코치

이수경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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