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이 2021. 4. 9 만 99세로 별세했다. 여왕 부부는 1947년 결혼해 74년을 함께 했다. 그 긴 세월을 해로하며 아름답게 이별한 부부에게 경의를 표한다.
여왕과 필립공은 거의 평생을 서로 알고 지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필립공은 13세, 여왕은 8세였다. 필립공은 1939년 영국 다트머스 해군대학 사관후보생이던 시절 이 학교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공주를 다시 만났다. 당시 13세의 여왕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 가까워졌다고 한다. 키가 1m83㎝로 훤칠한 필립 공에게 엘리자베스 공주가 먼저 반했고, 영국군 장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필립 공과 연애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필립 공은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영국 왕실의 성공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필립 공의 누나들이 결혼한 독일 남성들이 나치 지지자라는 주장이 제기돼 영국에서 결혼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필립 공은 가진 것을 모두 버렸다. 1947년 초 그리스 왕실에서의 직위와 권리를 모두 포기하고 영국인으로 귀화한 뒤 그해 11월 여왕과 결혼해 74년간 곁을 지켰다.
결혼 후 부부는 대체로 화목한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들이라고 갈등이 없었을까. 필립공은 1952년 여왕이 즉위했을 때 자신의 성 마운트배튼을 가족의 성(姓)으로 사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여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왕실의 원래 성인 ‘윈저’를 계속 쓰기로 결정하면서 부부간 사이가 한동안 서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그는 여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외조의 왕’으로 불렸다. 그는 평소 “내가 할 일은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마지막도 결코 여왕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짐이나 가방을 옮기는 일을 왕실 직원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는 전기 프라이팬으로 아침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도 즐겼다.
BBC는 그가 “너무 튀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여왕인 아내 뒤에서 숨죽여 지낼 수만도 없는, 세상의 어떤 남자보다 특별한 삶을 살았다”라고 했다. 그는 여왕의 남편으로 처신하기 어렵다는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왕의 남편으로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 여왕이라는 아내의 그늘에 가려 74년이나 자기를 드러내지 못 하고 한평생을 사는 남자 입장에서는 사고(?)칠 만도 하건만 (잘 나가는 아내를 둔 많은 남편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 그랬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 그는 진정한 가정경영자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사이에 3남 1녀를 뒀다. 4남매 중 첫째인 찰스(73) 왕세자와 둘째 앤(71) 공주는 70대에 들어섰다. 윌리엄(39) 왕세손을 포함한 8명의 손자가 있다. 증손자는 10명이다. 앤 공주는 평소 “잠자기 전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함께 놀아주던 자상한 아버지였다”라고 했다.
여왕 부부는 후손들로 인해 아픔을 겪기도 했다. 장남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와 이혼하고 20대 시절 원래 연인이었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속을 썩인 것으로 알려졌고, 1997년 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으며, 둘째 손자인 해리 왕손과 그의 아내 메건 마클 왕손비가 지난 2월 중순 영국 언론들의 사생활 침해, 인종 차별적 태도 등을 이유로 영국 왕실과 완전히 결별하는 일도 겪었다. 마클은 최근 미국 유명 방송인인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등 왕실과 대립해왔다.
부부 사이는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여왕은 필립공이 별세한 뒤 “그의 죽음은 나의 인생에 큰 상실감을 남겼다”라고 말했다. 1997년 금혼식(결혼 50주년)에서 여왕은 “그는 나의 힘이 되어주었고 내 곁에 있었다”며 “나와 가족, 그리고 영국은 그에게 많은 것을 빚졌다”는 말에서 평소 부부 사이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필립공의 별세 소식을 접하면서 그가 생전에 했다는 말이 귓전을 맴돈다. “결혼의 필수 요소 중 하나는 인내” 그렇다. 나도 38년째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만 백 퍼센트 동감이다. 결혼에 필요한 덕목이 여러 가지(사랑, 열정, 책임감, 헌신, 경제력, 봉사)가 있겠지만 그중에 최고는 인내다. 인내가 뭔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해내는 것이다. 부부가 74년을 같이 살면서 어찌 좋은 일만 있었겠는가. 하기 싫고 귀찮고 힘든 일이지만 배우자와 가족을 위해 해내는 것이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그 열매가 바로 자녀다. 나아가 가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를 만나든 그를 ‘가문의 시조’라고 부른다. 부부로 만나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여자의 남자로 74년을 함께 사는 동안 갈등과 위기, 우여곡절을 겪었겠지만 자식이 태어나고 그 자식이 또 결혼해 또 자식을 낳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다가 편안히 눈 감으면 그게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그들이 왕족이고 모든 것을 다 누린 부유층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게다. 보통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행복 중에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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