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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솔 Sep 25. 2021

싱글맘으로 살아가기

01

임신 초기부터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 전남편과 나는 임신 6개월을 기점으로 별거를 시작했고, 이혼을 결정했다. 지지부진하게 양육권과 생활비, 그리고 양육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서로 감정적으로 너무 격양되어 있던 시기라 결정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진도가 나가기 쉽지 않았다.

점점 배가 불러와 만삭에 가까워질 무렵 나의 공포감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나는 태동을 느끼면서 아이에 대한 신비로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애정은 가지기 시작했지만 확신을 가지고 양육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가장 큰 두려움은 생계에 대한 것이었다. 임신도, 결혼도 내 인생에는 아무 계획도 없던 일이라 그 당시 내 통장잔고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결혼 전 나의 직업은 프리랜서 사진작가였다. 성수기에는 돈을 벌었고, 비수기에는 손가락을 빨았다. 한 번 촬영에 들어가면 촬영 내용에 따라 길게는 며칠, 짧게는 6,7시간 촬영을 했다. 이르게는 새벽 5시, 6시에도 촬영 장소에 도착해야 했고 늦는 날은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촬영이 끝났다. 그렇게 해서 벌어도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였지 한 번도 부유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사진 일을 계속하면서는 엄마 없이는 기저귀도 갈 수도 없고, 배를 곯아야 하는 어린 아기를 일을 하며 돌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다 아이를 돌보면서 다른 일을 구하기에  6년 정도 이어져온 내 직업 외에 나는 아무 재주도 없었다. 그 흔한 컴퓨터 자격증 하나 없었고, 사진을 보정하는 포토샵 작업 외에는 일러스트 프로그램 하나 다룰 줄 몰랐다.


나 하나라면 공장에 들어가서 3교대라도, 2교대라도 무슨 일이라도 해서 배를 곯지는 않겠지만 아이와 함께라고 생각하면 두려웠다. 배를 곯고, 가스가 끊기고 제대로 발 뻗을 공간조차 없는 집에서 내가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가난해 본 적이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은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좁디좁은 낡은 빌라를 배경으로 했고, 버스비가 없어서 한 시간 거리를 걸어야 했던 고생스러움은 내 몸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내 몸에 각인된 가난이 내 아이를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공포를 부풀렸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비슷한 정도로 엄마 없이 자랄 아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웠고, 젖을 물리고 품에 안다가 아이를 못 보게 된 후 내 상처가 너무 두려웠다. 배 아파 아이를 낳고 나면,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나면, 아이를 안아보고 나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게 될지 이미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와 정드는 것도 두려웠다. 내가 받을 상처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아이를 낳기 전에, 낳은 아이를 사랑하게 되기 전에 양육권 문제를 결정짓고 싶었다. 이미 결정된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의 정리를 시작하고 싶었다.

내가 아이를 양육하게 되면 모자센터를 알아보든지,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을 알아보든지 하고 싶었고 양육권을 전남편 쪽에서 가지게 되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보내고 마음의 상처를 줄이고 싶었다. 아이를 낳은 지금은 아이를 낳기 전에 양육권을 결정하자던 나의 의견이 억지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절박했다.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 빨리 상의하고 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하지만 전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한참 양육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줄 수 있는 양육비의 금액에 대한 부분, 아이의 성에 관한 부분 등 의견이 갈리면 ‘일단 낳아봐.’라고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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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조산기로 퇴원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조산기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 나는 너무 초조했고, 출산예정일을 4주보다 조금 남기고 계속 대화를 피하며 ‘일단 낳아나보고 얘기해라.’는 배짱을 부리는 전남편의 태도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오늘도 대화를 피하면 시부모님과 직접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나의 강경한 태도에, 아직 별거 사실 조차 밝히지 못했던 전남편은 그제야 그의 집에도, 나의 집에도 전화를 하고 내 이혼 결심을 돌리고자 애썼다.


친정아버지는 이제껏 별거를 해왔다는 사실에 화를 내며 이혼을 하겠다는 내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고, 마음도 몸도 너무 지쳤던 나는 그때 막무가내로 이혼은 절대 안 된다는 아버지와의 연락도 끊었다. 아이와 나, 정말 단 둘이 남았다. 시댁이며, 친정식구들이 이혼에 관한 이야기로 내 전화기를 뜨겁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주고 나를 겁박해오는 상황에서 나는 삼일 밤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한 채로 울기만 했다.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는지 사일 째가 되던 날 결국 내 아이는 출산예정일보다 4주 이르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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