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못으로 미국에서 산다는 것
해외에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써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아랍어나 불어 등과 같이 생소한 언어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정규 교육 과정으로 10년 넘게 공부를 해온 ‘영어’를 쓰는 나라인데 미국에서 현지인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건 4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솔직히 영어를 잘 못해도 음식 주문은 물론 물건 구매나 환불, 병원 예약 등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회화는 어느 정도 반복을 거치다 보면 익숙해져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처음에는 말이 너무 빠르고 잘 못 알아들어서 다시 한번 더 얘기해 달라고 하면 똑같이 빠르게 얘기를 하니까 답답함의 연속이었는데, 이제는 미리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예상되는 질문이나 대화 흐름상 눈치껏 유추를 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요령이 생겼다.
대화라기보다는 소극적인 대답일 뿐이지만 상대방의 예상을 벗어나는 돌발 질문만 아니라면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다.
쇼핑할 때 카드 만들라고 하는 것만 잘 듣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반복된 회화가 아닌 우연히 마주한 상황에서는 대처가 쉽지 않은데 위급 상황이 생길 때마다 해결을 위해 회사에서 일하는 남편을 호출하기는 어렵다.
주재원 와이프로 미국에서 살면서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들을 몇 가지 추려보았다.
1. 위급상황 대처 시
미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할 정도로 차는 미국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아이템인데 이런 차에 갑자기 이상이 생기거나 점검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
나는 한국에 거주할 때 자차를 소유한 적도 없고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했기 때문에 차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것이 없었는데, 미국에서 살면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것들이 많았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 앞에서 달리던 덤프트럭 때문에 유리창에 금이 가서 전문 용어로 땜빵도 해보고 출발하려는데 타이어 공기압 부족 알람이 떠서 근처 수리소 갔다가 타이어 공기압도 직접 넣어봤다.
우리는 차가 하나뿐이니 엔진오일을 갈거나 점검도 내 몫이었다.
2. 집에 수리할 일이 생길 때
와이파이가 안 되거나 가전제품이 고장 났을 때 수리하는 사람을 불러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와이파이는 뒷마당에 잔디를 깎다가 인터넷 선도 함께 잘라서 몇 번 수리했었고, 건조기 배관에 새가 둥지를 터서 배관 전체를 청소해야 했다.
특별히 대화할 일은 많지 않지만 집에 왔을 때 상황을 설명한다거나 수리 후 주의사항을 듣거나 결제를 하는 등 영어를 써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3. 집에 판촉 하러 올 때
미국은 여전히 오프라인 마케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우편으로 광고 책자나 전단지를 보내거나 흔하지는 않지만 직접 집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다.
내가 사는 곳이 새롭게 형성된 단지이다 보니 대부분 인터넷이나 집 관련 홍보를 많이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찾아왔던 건 Pest Control
사실 이마저도 우린 세입자라서 잘 모른다. 집주인에게 물어봐야 된다. 등 짧은 영어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Uber eats나 DoorDash와 같이 배달앱을 이용할 때도 집 앞에 놔두고 가달라고 요청하면, 비대면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상황들을 제외하고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영어를 쓸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러니 미국에 살아도 영어가 늘지 않았겠지만..